전세계에서 자동차의 대량보급이 가장 일찍 시작된 미국은 오늘날까지 세계에서 손꼽히는 자동차 강국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 중 하나다. 미국의 자동차 역사는 유럽과 비슷한 시기인 19세기 말엽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수많은 자동차 제조사들이 생겨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와중에 20세기 초인 1908년, 헨리 포드가 세운 포드자동차에서 '모델 T'라는 이름의 대량생산 자동차를 내놓음으로써 미국 전역에 자동차가 빠른 속도로 보급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20세기를 지나는 동안, 미국의 그 수많은 자동차 제조사들은 다른 기업에 인수/합병되거나 파산으로 문을 닫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특히 20세기 후반에 벌어진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전후로 미국의 자동차 산업계는 승용 부문에서 부진을 면치 못했다. 보급형 자동차 시장에는 저렴하면서도 우수한 품질과 뛰어난 경제성을 앞세운 일본계 자동차 제조사들에게, 고급형 자동차 시장에서는 우수한 성능과 뛰어난 감성품질을 앞세운 유럽권 브랜드들의 맹공에 시달리며 시장을 잠식당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또 한 번 수많은 제조사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미국의 주요 자동차 제조사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올즈모빌(Oldsmobile)
1897년, 랜섬 올즈(Ransom E. Olds)가 세운 이 오래된 자동차 회사는 미국 자동차산업 역사 상 가장 오랫동안 사업을 영위한 제조사로 남아 있다. 이 회사는 창립 초기에는 미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자동차 제조사 중 하나로 손꼽혔다. 그러다가 1908년, 제너럴모터스(이하 GM)에 인수되면서 올즈모빌은 두 번째 전성기를 맞게 된다. 올즈모빌은 GM의 신기술들이 가장 먼저 적용되는 혁신적인 제조사로 발둗움한다.
여기에 1950년대 나스카(NASCAR)에서 좋은 성적을 잇달아 거두며 '고성능 자동차'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또한 올즈모빌의 자동차는 캐딜락이나 뷰익 같은 고급 브랜드 대비 저렴하면서도 유려한 디자인과 더불어 쉐보레나 폰티액보다 풍부한 편의장비를 갖춰 젊은 중산층으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고, 1970년대 중후반에 이르게 되면 중산층이 선호하는 준고급 자동차 브랜드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하지만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지나는 과정에서 이른 바 양품염가(良品廉價, 좋은 제품, 저렴한 가격)를 내세운 일본의 자동차들이 저가형 자동차 시장을 매서운 기세로 파고들면서 올즈모빌의 설 자리가 위협받게 된다. 이 뿐만 아니라 1980년대 GM이 수익성 개선을 위해 자행한 무분별한 배지 엔지니어링(Badge Engineering, Rebadging)으로 인해 GM 산하 브랜드 간의 차별성은 떨어지고, 상품성마저 덩달아 악화되면서 부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에 새로운 고객층을 끌어들이기 위해 진행했던 광고를 진행하면서 올즈모빌은 완전히 이미지를 망치게 된다. "이것은 아버지의 올즈모빌이 아니다(This is not your father's Oldsmobile)"라는 캐츠프레이즈로 대표되는 이 광고 캠페인은 목표로 했던 젊은 층에게는 전혀 어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희대의 자기부정으로 인해 기존에 이미 올즈모빌에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기존 고객들마저 등을 돌리게 만드는 역효과를 내며, 올즈모빌의 이미지는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이후 올즈모빌은 어정쩡한 브랜드 포지션과 차별화 실패로 실적을 회복하지 못하다가 2004년, 끝내 브랜드 자체가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폰티악(Pontiac)
1926년 GM이 자체적으로 설립한 자동차 브랜드다. 폰티악은 젊고 대중적인 브랜드로 알려져 있었지만 설립 초기에는 기존에 산하에 있었던 제조사 오클랜드(Oakland)보다 상위에 위치한 고급 브랜드로 출범했다. 이 브랜드는 초기부터 스포티한 디자인과 주행감각, 고성능을 내세워 젊은 고객층을 노린 브랜드로 인기를 누렸었다. 특유의 스포티한 스타일과 2슬롯 라디에이터 그릴로 인해 '빈자의 BMW'라는 별명도 있었을 정도였다.
폰티악은 그랑프리(Grand Prix)를 시작으로 머슬카로 유명한 GTO, 카마로의 형제차이자, 국내에서는 전격 Z작전의 '키트'로 유명한 파이어버드(Firebird) 등, 여러 명차를 만들어 내며, 1970년대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대우자동차가 생산한 르망(Le Mans)이 이 회사의 엠블럼을 달고 팔려 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폰티악 브랜드의 영광스러운 시절은 1980년대를 전후하여 끝났다. 저가형 자동차 시장을 매섭게 파고 든 일본 브랜드들에게 시장을 잠식당하는 동안, GM은 올즈모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폰티악 브랜드에까지 무분별한 뱃지 엔지니어링의 남용으로 브랜드 이미지만 깎아 먹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실적은 전혀 개선되지 못했다. 1980년대 들어 폰티악은 전성기인 1960년대 대비 판매량이 70%나 쪼그라들었다. 또한 SUV나 픽업트럭 등, 유틸리티 차량이 인기를 크게 인기를 얻고 있었던 시점이었음에도 올즈모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유틸리티 차량이 단 한 대도 없어 1990년대에도 부진은 계속되었다. 이에 2009년 파산 위기에 처한 GM이 수익성 악화를 이유로 2010년에 브랜드를 폐기하면서 폰티악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새턴(Saturn)
이 브랜드는 위나 아래에 나열될 다른 브랜드에 비해 굉장히 단명한 브랜드다. 1985년 GM의 완전 자회사로 출범한 이 브랜드는 1980~90년대 미국의 승용차 시장을 잠식하고 있었던 일본계 자동차 제조사들과 독일 폭스바겐 등의 브랜드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더욱 낮은 가격과 진보적인 디자인으로 젊은 고객을 끌어 들이려고 했던 이 브랜드는 여러모로 전성기의 폰티악 브랜드와 비슷한 포지션을 취하고 있었다. 여기에 비슷한 시기 론칭한 지오(Geo) 브랜드와 함께, "무흥정, 무혼란(No-Haggle, No-Hassle)" 정찰가 정책, 그리고 론칭 초기에 벌인 뛰어난 서비스 캠페인 등으로 젊은 소비자들을 상당히 끌이들이면서 일본 자동차 제조사에 대항할 수 있는 미국 브랜드로 성장해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 신차가 S-시리즈 뿐이었기에, 혁신을 내세웠던 브랜드 이미지가 점점 퇴색되기 시작한 것도 모자라, GM 산하의 다른 브랜드들이 새턴 브랜드에 대한 막대한 투자에 반발하기 시작하며 내홍을 겪어야만 했다.
여기에 2000년대 초반에 토요타자동차가 저가형 브랜드로 작심하고 내놓은 사이언(SCION) 브랜드의 등장으로 인해 새턴 브랜드의 입지는 계속해서 떨어져 갔다. 이로 인해 GM은 이후 새턴에 기존 자사 자동차들을 리뱃징하여 판매하는 일을 또 다시 벌였고, 새턴 브랜드는 2000년대 후반에 들어 경쟁력을 상실, 2010년에 폐지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