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카 공방에서 럭셔리 브랜드로 - 재규어 이야기(하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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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카 공방에서 럭셔리 브랜드로 - 재규어 이야기(하편)
  • 박병하
  • 승인 2019.12.16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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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이후 재기에 나선 '재규어 자동차(Jaguar Cars Limited)'는 1948년, 어렵게 준비한 신차 XK120을 전격 공개했다. 하지만 이 차는 당시 영국의 언론에서 온갖 의심과 조롱을 받았다. 그 이유는 이 차의 이름과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에 있었다. XK120의 120은 최고속도 120mph(약 193km/h)을 넘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 언론의 반응을 살펴 보면, “120mph은 커녕, 그 전에 차가 먼저 고장 날 것”이라는 극언도 나올 정도였다.

언론의 이 같은 반응을 접하게 된 라이온즈는 격노했다. 자신의 제품과 회사를 폄하한 것을 넘어, 공학자로서의 자존심에까지 상처를 입혔기 때문이다. 라이온즈는 자신과 자신의 차를 의심하는 언론에게 본 때를 보여주겠다는 심산으로, 벨기에의 자베크(Jabbeke)라는 지역에 위치한 왕복 2차선 도로 한 곳을 폐쇄했다. 그리고 그곳으로 자신과 자신의 차를 모독한 영국의 언론인들을 몽땅 불러 모으고는, 자신이 직접 XK120의 운전대를 잡고 ‘성능 시연’에 나섰다.

그 결과는 대성공. 이 날 성능 시연을 하면서 기록한 최고속도는 본래의 목표이자, 차명의 유래이기도 한 120mph가 아닌, 무려 132mph(약 213km/h)에 달했던 것이다. 이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성능 시연은 말 많던 영국 언론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고, 이내 재규어 자동차를 ‘고성능 자동차’로서 알리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재규어 자동차의 이름을 드높였고, ‘고성능’을 추구하는 재규어의 방향성을 그대로 드러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재규어 XK120은 스포츠 쿠페 'XK 시리즈'의 효시가 된다. 재규어 XK 시리즈는 ‘XK140’, ‘XK150’등으로 출시되며 재규어 스포츠카 라인업의 한 축이 된다. 재규어 XK시리즈는  재규어 스포츠카의 정수로, 이 차들은 1950년대 르망 24시 레이스에서 통산 5회 우승을 따낸 ‘재규어 C-타입’과 ‘재규어 D-타입’ 등의 명차를 만들어 낸 밑바탕이 되었다. 이 당시 재규어의 경주차들은 항공기의 공기역학적 구조에서 착안한 외관 디자인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그리고 재규어 XK의 이름은 비교적 최근까지 존속하고 있었던 GT 성향의 스포츠카 ‘XK’ 시리즈까지 이어지게 된다.

1955년에는 재규어 세단의 효시인, 'Mk 시리즈'의 첫 차, 'Mk. I'을 발표했다. 재규어의 첫 번째 세단 Mk. I은 특유의 우아하고도 고전적인 감성이 물씬 풍기는 스타일이 인상적인 세단 모델이다. Mk. I의 우아한 디자인은 후대의 재규어 모델들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하지만 이 우아한 외형의 뒤편에는 주행성능을 중시하는 재규어의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었다. 2.4리터 엔진을 심장으로 삼은 재규어 Mk.I 세단은 성능 시연에서 120mph를 기록했다.

이 차량의 부족한 점을 보완한 Mk.II는 이보다 더욱 큰 3.4리터급 엔진을 실어 200km/h 이상의 속도를 내는 고성능 세단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Mk II 세단의 엔진의 배기량을 '또' 늘려, 출력을 강화시킨 Mk II 3.8 경주차는 1960년부터 3년간 '투르 드 프랑스(Tour de France)'의 투어링 카 부문 우승컵을 쓸어 담는 대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성능 중심의 설계 사상, 그리고 그것을 결과로 입증해 준 모터스포츠에서의 눈부신 성과들을 통해, 재규어는 고급 자동차 브랜드로서 꾸준히 성장을 거듭했다. 재규어는 1960년, 영국의 고급 자동차 제조사인 ‘데임러(Daimler Motor Company. 독일의 다임러AG(Daimler AG)와는 다름)’를 인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때 인수한 데임러 브랜드를 훗날 ‘데임러’, 혹은 ‘데임러 소버린(Daimler Sovereign)’ 등으로 불리는 자사 최고급 세단에 붙는 서브 브랜드로 활용하였다.

1960년대는 그야말로 재규어 역사에서 가장 황금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를 가장 찬란하게 빛낸 걸작이 바로 ‘E-타입’이다. E-타입은 항공기 엔지니어 출신인 말콤 세이어(Malcolm Sayer)의 미려한 스타일링과 더불어 C-타입, D-타입 등 50년대 르망24시를 호령했던 선조들의 피를 고스란히 이어 받아 뛰어난 성능을 자랑했다. 여기에 안락한 승차감까지 겸비하고 있어, 당대 최고의 GT(Gan Turismo) 중 하나로 손꼽혔다.

다만 미스터 재규어, 윌리엄 라이온즈는 이 차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재규어 E-타입의 뒷부분의 설계가 잘못되어 초고속에서 다운포스가 아닌, 양력을 받아 제어가 어려워진다는 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그러한 걱정이 무색하게 재규어 E-타입은 1961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공개되자마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총 7만2,500여대가 팔려 나갔다. 재규어 E타입은 유럽 시장은 물론, 미국 시장에도 XK12라는 이름으로 수출되었으며, 오늘날에도 클래식카 시장에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E-타입을 정신적인 선대 모델로 하는 스포츠카 F-타입이 현재 글로벌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재규어의 미래가 항상 장밋빛으로만 흘러간 것은 아니었다. 60년대 후반부터 영국 자동차 산업계의 출혈경쟁이 잦아졌고, 이 때문에 재규어에게도 재정 위기가 찾아 온 것이다. 이 때문에 재규어는 1966년 '브리티쉬 모터 코퍼레이션(British Motor Corporation, BMC)'에 합병되었다. 그리고 2년 후인 1968년, 영국 노동당 정부의 자동차 산업 통합 조치였던 '레일랜드(Leyland)와 합병'을 통해, 오스틴, 모리스, 란체스터, MG, 로버 등과 함께, '브리티시 레일랜드(British Leyland Mortor Company)'의 일원이 되었다.

재규어의 걸작 중 하나이자, 라이온즈가 남긴 마지막 유산으로 통하는 'XJ6 세단'이 등장하게 된 것이 바로 이 시절의 이야기다. XJ6는 고급 대형 세단으로, 출시 이후 무려 30년 동안이나 생산될 정도로 장수했는데, 이는 당시 브리티시 레일랜드 내부의 갈등으로 인한 신모델 개발 지연과 재정 악화 등으로 인해, 울며 겨자 먹기로 모델 체인지 없이 똑 같은 차만 주구장창 만들어야 했던 어두운 일면이 있다. 그리고 1972년, 재규어는 영국 자동차 산업의 몰락에 결정적 기여를 한 브리티시 레일랜드의 일원이 된 것도 모자라, 당시의 재규어를 일궈 온 윌리엄 라이온즈가 은퇴를 선언하면서 또 한 차례의 위기를 맞는다.

이 시기는 재규어의 역사에서 가장 지우고 싶은 역사일 지도 모른다. 재규어는 뒤늦게 XJ12, XJS 등의 신모델을 급하게 만들어 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들은 겉 모양으로는 신차일지언정, 그 기반 설계는 이미 30년도 더 지난 XJ6의 설계를 유용한 것에 지나지 않았고, 어떤 혁신도, 경쟁력도 제고할 수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브리티시 레일랜드 그룹 소속사들의 고질적인 문제로 항상 지적 받아 왔던 조악하기 이를 데 없는 품질과 형편 없는 신뢰성까지 겹쳐, 고급/고성능 제조사의 이미지와 명성에 먹칠만 거듭하고 있었다. 이후 재규어는 마거릿 대처 정부가 주도한 민영화의 물결에 따라, 다시 재규어 자동차로 분리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듬해인 1985년, 재규어를 이끌어 온 라이온즈가 사망하고, 4년 뒤인 1989년, 재규어는 미국 포드 자동차(이하 포드)에 인수되었다. 포드는 재규어 뿐만 아니라 랜드로버까지 함께 인수하였으며, 고급 스포츠카 제조사 애스턴 마틴과 스웨덴의 볼보자동차 등을 합쳐, 당시 포드가 구상했던 고급 자동차 브랜드 그룹인 'PAG(Premier Automotive Group)'의 일원이 된다.

PAG로의 편입은 재규어에게 있어서 중대한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재규어는 기술력이 우수한 포드와의 합병을 통해 포드의 일부 차종과 플랫폼을 비롯한 다양한 부품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덕분에 빠르게 신모델 개발에 나설 수 있었다. 이 당시 재규어가 새롭게 내놓은 세단 모델들은 브리티시 레일랜드 시절에 비해 신뢰성과 생산성 면에서 크게 발전했다.

그렇게 탄생한 모델들이 바로 재규어 X-타입과 S-타입이다. 재규어 X-타입은 유럽 포드의 '몬데오(Mondeo)'와 플랫폼을 공유하는 모델로, 전륜구동계를 채용한 유일한 재규어 모델이다. 비록 몬데오의 플랫폼을 공유한다는 이유로 그다지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야만 했으나, 향상된 품질과 상품성으로 주목 받았다.  S-타입은 링컨 LS의 후륜구동 플랫폼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준대형급 세단 모델로, 특히 미국 시장에서 호평 받으며 재규어의 재건을 도왔다. 2000년에는 모터 스포츠를 마케팅에 이용한 과거의 성공 사례를 참고하여 '재규어 레이싱(Jaguar Racing)'을 조직, 재규어 사상 처음으로 F1에도 진출했다. 그야말로 제2의 전성기에 다름 없었다.

또한 재규어는 1990년대에 XK120의 정신을 되살린 수퍼카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 당시 만들어진 재규어 수퍼카의 이름은 'XJ220'이었다. 차명은 'XK120'에서 비롯된 작명법을 따른 것으로, 무려 220mph(약 354km/h)의 속도를 목표로 했다. 이는 당시를 주릅 잡았던 페라리 F40과 포르쉐 959보다 빠른 속도였다. 엔진은 초기에는 530마력의 6.2리터 V12 엔진과 상시 4륜구동계를 실으려 했으나, 차체 및 환경 문제에 발목이 잡혀, 3.5리터 V6 터보 엔진을 사용하게 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새로이 적용한 엔진이 제원 상 출력과 토크 수치가 당초 계획했던 6.2리터 V12 엔진에 비해 조금 더 높았는데도 불구하고, 원래 목표인 220mph 도달에는 실패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같은 시기, 세계에서 가장 빨랐던 '386km/h'의 최고속도를 자랑한, '멕라렌 F1'이 등장하면서 XJ220은 수퍼카 시장에서 별 다른 이목을 끌지 못했다.

2000년대, 재규어는 또다시 침체기에 들어섰다. 야심차게 준비한 X-타입과 S-타입이 초기의 인기를 이어가지 못한 것이다. X-타입은 대중차인 몬데오와 플랫폼을 공유하면서 브랜드의 개성이 흐려진 실패작으로 평가 받고 S-타입은 초기 시장 반응이 무색하게, 곳곳에서 품질 문제가 터져 나왔다. 그리하여 '1999년 올 해의 상품'으로 선정됐던 차는 불과 몇 년 사이에, 미국에서 '가장 인기 없는 차 Worts 10'에 이름을 올리는 굴욕을 맛 봐야만 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2000년대 후반을 강타한 세계 금융위기에 직격타를 맞은 포드가 '원 포드'라는 기치 하에 과격한 구조조정에 들어가면서 산하 브랜드들을 정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재규어가 소속된 PAG 산하 브랜드들은 세계 시장에 매물로 올라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재규어는 인도의 타타자동차에 랜드로버와 함께 넘어가게 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타타자동차 인수 이후 재규어는 재기를 위해 대대적인 체질 개선에 나섰다. 애스턴 마틴의 디자이너로 유명한 이안 칼럼을 영입하여 기존의 고전적인 스타일에서 벗어난 새로운 디자인 언어를 정립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에 발맞춰 적극적인 신제품 개발과 브랜드 이미지 제고를 위한 노력을 통해 재기에 성공한 브랜드로 평가 받는다.

현재 재규어가 생산하고 있는 차종으로는 알루미늄 차체를 적용한 최고급 세단, `XJ`를 시작으로, 준대형 세단이자, 재규어를 살린 일등공신 `XF`, 재규어식 GT카의 정수인 `XK`, E-타입을 잇는 스포츠카 `F-타입`, 그리고 X-타입 단종 이후, 6년여 만에 나타난 엔트리급 재규어인 `XE` 등의 모델들을 생산하고 있다. 2015년에는 브랜드 최초의 SUV 모델 `F-페이스`를, 2016년에는 순수전기차 'I-페이스'를, 2017년에는 'E-페이스'를 출시하며 크로스오버 및 전기차 시장에도 발을 들였다. 특히 최근에는 전기자동차와 자율주행 등, 기술선도적인 기업으로서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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