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카 공방에서 럭셔리 브랜드로 - 재규어 이야기(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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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카 공방에서 럭셔리 브랜드로 - 재규어 이야기(상편)
  • 모토야
  • 승인 2019.12.16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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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자동차 기업에는 모두 자신만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유산이 있다. 하지만 모든 자동차 기업이 처음부터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 사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물론 대다수의 자동차 기업은 처음부터 자동차 사업에 뜻을 두고 회사를 일으킨 경우에 해당하지만, 아예 다른 분야의 사업에서 출발하여 자동차로 영역을 넓힌 경우도 많다.

그 예로, 영국을 대표하는 럭셔리카 제조사 롤스로이스가 있다. 롤스로이스는 항공기의 엔진을 만드는 것을 주업으로 하다가 ‘겸업’으로 자동차 사업을 시작했다. 독일의 BMW는 항공기 엔진을 중심으로 사업을 전개해 오다가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에 자동차/이륜차 사업으로 전업했다. 프랑스의 푸조는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시대에 설립된 푸조 가문의 금속공방에서 출발, 20세기 초부터 자동차 산업에 뛰어 들었다. 또한 지금은 사라지기는 했지만 스웨덴의 사브 자동차(SAAB Automobile AB)는 전투기 제작을 주업으로 하다가 겸업으로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한 경우다.

이번에 소개하게 될 브랜드, ‘재규어자동차(Jaguar Cars Limited, 이하 재규어)’ 또한, 자동차가 아닌 분야에서 출발한 특이한 이력을 가진 자동차 제조사다. 재규어는 현재 영국을 대표하는 고급 자동차 제조사로, 세단과 스포츠카를 주력으로 하는 브랜드다. 재규어는 롤스로이스 등과 함께 자사의 자동차들을 영국 왕실에 납품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시작은 다른 고급 자동차 제조사들과는 달랐다.

재규어의 역사는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5년여가 지난 1922년 영국 랭커셔 주에 위치한 항구도시, 블랙풀에 세워진 ‘스월로우 사이드카 컴퍼니(Swallow Sidecar Company: SSC)’라는 조그만 공방에서부터 시작했다. 이 공방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두 사람의 공학도에 의해 세워졌다. 그 중 한 명은 ‘윌리엄 라이온즈(Sir William Lyons)’,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라이온즈의 건너편 집에 살았던 ‘윌리엄 웜슬리(William Walmsley)’다. 두 사람은 이름도 같은 데다 취미도 같았다. 두 사람은 모터사이클에 흠뻑 매료되어 있었고, 틈만 나면 모터사이클에 몸을 싣는 것을 취미로 했던 열혈 라이더들이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세운 작은 공방은 다름 아닌, 모터사이클의 측면에 설치하는 ‘사이드카(Sidecar)’를 만드는 곳이었다.

사이드카는 이륜자동차의 측면에 장착하여 승객을 태우거나 짐을 싣는 등의 용도로 사용하는 탈것을 말한다. 사이드카는 자동차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구할 수 있는 덕에 자동차가 대중화되기 전까지는 이륜차가 대중화된 지역에서 상당히 널리 사용되었던 이동수단이다.

스월로우 사이드카 컴퍼니를 운영하던 두 명의 윌리엄은 몇 년 동안 사이드카를 제작하면서 다양한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사이드카는 일견 단순해 보일 지 모르지만, 그 안에는 자동차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기술들이 적용된다. 일단 차체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금속 판재를 재단하고 접합/가공하는 판금 기술이 필수다. 그리고 좌석과 같은 내장재도 직접 제작해야 했으므로, 가죽 및 직물의 마감 처리와 관련된 기술도 습득해야 했다. 그리고 윈드스크린을 제작하기 위한 유리 가공 기술도 필요했다.

그런데 이러한 기술들이 모두 갖춰져 있었다는 것은 ‘다른 방향’으로도 사업을 전개해 나갈 수 있었던 기반이 된다. 이 기술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영국식으로는 코치빌더(Coachbuilder), 이탈리아식으로는 카로체리아(Carrozzeria)로의 영역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당시만 해도, 자동차 제조사는 ‘섀시(Chassis)’를 만드는 곳을 가리켰다. 여기서 말하는 섀시는 차체구조뿐만 아니라 엔진과 변속기, 서스펜션 등, 차량의 구동과 조종에 필요한 모든 것이 포함된 ‘롤링 섀시(Rolling Chassis)’의 형태라고 보면 된다. 과거에는 지금과는 다르게, 승용차조차 바디(Body)와 섀시(Chassis)가 서로 분리되어 있었고, 이를 제작하는 곳 또한 분리되어 있었다. 이 ‘굴러다니는’ 섀시에 바디를 입히고 내장재를 비롯한 각종 의장품을 설치하는 일을 맡았던 곳이 바로 영국식으로는 코치빌더(Coachbuilder), 이탈리아식으로는 카로체리아(Carrozeria)라고 불리는 곳이다.

이를 가장 먼저 캐치해 낸 윌리엄은 훗날 ‘미스터 재규어(Mr. Jaguar)’라는 이명으로 불리게 될 라이온즈였다. 라이온즈는 스월로우 사이드카 컴퍼니가 경험을 쌓으면서 어느덧 당시 자동차에서 필요로 하던 기술들을 상당부분 습득한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1927년, 당시 영국에서 ‘국민차’로 통할 정도로 저렴한 가격에 팔리고 있었던 ‘오스틴 7(Austin 7)’의 섀시에 자체적으로 제작한 차체를 얹는 작업을 시작했다. 라이온즈가 제작한 첫 번째 자동차는 오스틴 7의 섀시 위에 벤틀리(Bentley) 자동차의 디자인을 참고한 바디를 얹은 것이었다. 오스틴 스월로우(Austin Swallow)라는 이름이 붙은 이 차는 1927년 처음 만들어졌다.

하지만 첫 술에 배부를 수 없었다. 자동차를 제작한다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스월로우 사이드카는 서로 다른 버전의 오스틴 스월로우들을 제작해가며 자동차 제조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자동차를 생산하기에는 블랙풀의 작은 공방은 너무나 비효율적이었기에 지금의 재규어 본사가 있는 코벤트리(Coventry) 지역에 새 공장을 마련했다. 이렇게 자동차 개발은 더욱 진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스왈로우 사이드카는 스탠다드 모터 컴퍼니(Standard Motor Company)의 섀시를 기반으로 한 신차를 완성했다. 차량의 이름은 스월로우 사이드카의 이니셜 ‘SS’와 첫 번째 자동차라는 의미의 ‘1’을 붙인 ‘SS1’이었다. 그리고 라이온즈는 이렇게 만든 SS1을 1931년 런던 모터쇼에서 영국의 대중 앞에 선보였다.

대중의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벤틀리를 닮은 스타일에 당시 기준으로 ‘착한’ 가격과 나쁘지 않은 품질까지 갖춘 덕분이었다. 벤틀리는 당시에도 부유한 귀족이나 신사 계급의 전유물로 통하는 최고급 자동차 중 하나였다. 그런데 벤틀리의 스타일을 닮은 이 차의 가격은 1932년 당시 310파운드로, 벤틀리 차량의 1/3 수준에 불과했다. SS1은 그 가능성을 증명하듯 각지에 팔려 나가기 시작하며 회사를 성장시키기 시작했다. SS1의 성공은 자동차 산업에 이제 막 뛰어 든 신출내기에 불과했던 라이온즈에게 큰 자신감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SS1의 성공으로 스월로우 사이드카 제작소는 ‘스월로우 사이드카 & 코치빌딩(Swallow Sidecar and Coachbuilding: SSC)’이라는 기나긴 이름으로 간판을 바꿔 달고, 본격적으로 코치빌더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공동 창업주인 두 윌리엄 중 다른 윌리엄, 웜슬리가 자동차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 드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SS1의 성공을 전후하여 라이온즈와 의견 충돌을 빚었다. 라이온즈가 자동차 사업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고 공격적으로 투자를 끌어 들여 회사를 성장시키려고 했던 반면, 웜슬리는 ‘본업’인 사이드카 제작에 전념하고자 했다. 성장보다는 현상유지를 원했던 그는 끝내 라이온즈와 관계가 틀어지면서 회사를 떠나고 말았다.

이렇게 스월로우 사이드카 컴퍼니는 공동 창업주인 두 윌리엄 중 한쪽을 잃었다. 그렇지만 라이온즈는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그는 웜슬리가 떠나자, 아예 작정하고 회사의 체질 개선에 나섰다. 라이온즈는 지속적인 자동차 부문의 신제품 개발을 위해 웜슬리가 떠난 자리에 외부의 유수한 공학자들을 불러 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시작점이었던 사이드카 공방을 과감하게 정리, 본격적인 자동차 제조사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스월로우 사이드카 & 코치빌딩은 `유한회사 SS자동차(SS Cars Ltd)`로 다시 한 번 이름을 바꾸게 된다.

라이온즈의 과감한 경영에 따라 번듯한 자동차 제조사로서 거듭난 SS 자동차는 1935년, 독자기술로 완성한 새로운 양산차를 내놓았다. 이 차의 이름은 다름 아닌 ‘SS 재규어(SS Jaguar)’다. 그리고 이 차의 이름이 바로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재규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된다. SS 재규어는 2인승 컨버터블 스포츠카로, 고급스러운 외관과 가볍고 탄탄한 기반 설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SS 자동차는 그 이듬해인 1936년, ‘SS100’이라는 이름의 신차를 잇달아 출시했다. SS100의 숫자 100은 최고속도가 100mph(약 161km/h)를 넘는 차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출발을 하며 한껏 희망에 부풀어 있었던 SS자동차는 다시 한 번 어려움에 직면해야 했다. 1939년,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전세계가 휩쓸린 제 2차 세계 대전은 바다 건너 있었던 영국에게도 감당하기 어려운 피해를 입혔다. 그리고 전쟁은 SS자동차가 또 다시 간판을 바꿔 달게 만들었다. 그 이유는 하필이면 나치 독일이 낳은 최악의 무장 조직, ‘슈츠슈타펠(Schutzstaffel)’의 이니셜이 'SS'였기 때문에, 더 이상 이 이름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SS자동차는 드디어 오늘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재규어 자동차(Jaguar Cars Limited)'로 그 이름을 바꿔 달고 다시금 새로운 출발을 꾀했다.

전쟁이 끝나고 3년 뒤인 1948년, 윌리엄 라이온즈는 그 동안 어렵게 준비해 온 신차 'XK120'을 출시했다. XK120은 재규어는 물론, 영국 자동차 역사에도 큰 족적을 남긴 차다. 왜냐하면 이 차는 당시 120mph(약 193km/h)의 벽을 처음으로 돌파한 양산형 자동차이기 때문이다. 이 당시 120mph의 속도는 경주차나 낼 수 있는 속도였고, 양산차에게는 꿈의 영역과 다를 바 없었다. 오늘날로 대입한다면 세계 최초로 400km/h의 벽을 깬 부가티 베이론이 등장한 것과 비슷한 격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그 배경은 전혀 다르다. 부가티 베이론은 폭스바겐이라는 거대기업집단이 뒤에 버티고 있는 상태에서 최고의 기술진과 드라이버, 그리고 막대한 현금과 시간을 쏟아 부어 완성된 차다. 반면 XK120은 당시 기준으로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기업이 무너져가는 회사를 겨우 추스린 끝에 만들어 낸 차였다. 따라서 당시 영국의 언론은 XK120에 대해 의심과 조롱을 쏟아냈다. 심지어는 “120mph은 커녕, 그 전에 차가 먼저 고장 날 것”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언론의 이 같은 반응을 접하게 된 라이온즈는 격노했다. 자신의 제품과 회사를 폄하한 것을 넘어, 공학자로서의 자존심에까지 상처를 입혔기 때문이다. 라이온즈는 자신과 자신의 차를 의심하는 언론에게 본 때를 보여주겠다는 심산으로, 벨기에의 자베크(Jabbeke)라는 지역에 위치한 왕복 2차선 도로 한 곳을 폐쇄했다. 그리고 그곳으로 자신과 자신의 차를 모독한 영국의 언론인들을 몽땅 불러 모으고는, 자신이 직접 XK120의 운전대를 잡고 ‘성능 시연’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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