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의 엔진은 두 가지의 상반된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한 가지는 차가움이고, 나머지 하나는 뜨거움이다. 이렇게 두 가지의 상반된 속성을 갖는 이유는 금속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증기기관으로부터시작된 엔진의 역사 이래 인류는 항상 금속으로 엔진을 만들어 왔다. 최근에는 재료역학의 발달로 인해금속 외의 다른 합성 재료를 사용하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지구상의 모든 엔진의 주류는금속이다. 강철과 알루미늄 등의 금속은 엔진이 잠에서 깨어난 시점부터 가동 시간 내내 발생하는 고열과마찰 등의 모든 부담을 감당할 수 있으며, 대량생산에도 적합하기 때문이다.
금속으로 만들어진,차가우면서도 뜨거운 자동차의 심장, 엔진의 세계로 독자 여러분을 초대한다. 본 기사에서 다룰 수많은 자동차의 엔진들 중 그 마흔 일곱 번째 이야기는 구 대우자동차 계열의 준중형차들에두루 쓰인 E-TEC 엔진에 대한 이야기다.
대우자동차의 소형 및 준중형을 책임진 심장
대우자동차 E-TEC엔진은 미국 제너럴 모터스(이하 GM)의 ‘GM 패밀리 1(GM Family 1)’ 엔진의 변형 중 하나다. GM 패밀리 1 엔진은 1982년처음 고안되어 지금까지 다양한 변형이 만들어지고 있는 엔진이기도 하다.
GM 패밀리 1 엔진을 기반으로 하는 대우 E-TEC 엔진은 주철 실린더 블록과 알루미늄 실린더 헤드를 사용하는 등의 특징을 공유한다. 배기량은 1.3리터(1,299cc)부터 1.4리터(1,349cc), 1.5리터(1,498cc), 1.6리터(1,598cc)의 4종이 존재하며, 배기량에 따라76.5~79.5mm의 실린더 보어(내경)와 73.4~81..5mm의 스트로크(행정 길이)를 갖는다. 연료 공급은 공통적으로 다점 연료 분사(Multi-Point Injection) 방식을 사용했다. 밸브트레인은DOHC(Double Overhead Cam)와 SOHC(SingleOverhead Cam) 방식이 모두 사용되었으며, DOHC 버전은 ‘E-TEC 16V’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대우 E-TEC 엔진의기원은 르망에 사용했던 4기통 1.5리터 가솔린 엔진에서찾을 수 있다. 이 엔진은 르망의 원형인 오펠 카데트 E(OpelKadett E)의 1.6리터 가솔린 엔진의 배기량을 당시 1,500cc 미만을 기준으로 하고 있었던 국내 소형차 세제에 맞게 줄인 것이다.88마력의 최고출력을 냈던 이 엔진은 르망의 주력 엔진으로 사용되었다.
E-TEC 엔진의 시작은 대우자동차의 첫 독자 모델인 에스페로(Espero)에사용된 1.5리터 DOHC 엔진이라고 할 수 있다. 대우자동차가 1991년 출시한 에스페로는 대우자동차의 첫 독자모델이자전륜구동 중형 세단으로 개발되었다. 그러나 에스페로는 부실한 초기 품질과 르망 임팩트에 사용했던 2.0리터 CFI 엔진의 성능 부족으로 인해 쏘나타의 상대가 되지못했다. 이후 대우자동차는 에스페로를 과감하게 ‘준중형’으로 강등시키는 대신, 프린스를 투입하여 전력의 공백을 메우게 된다.
이렇게 준중형차로 강등된 에스페로를 위해 개발한 에스페로의1.5리터 DOHC 엔진은 SOHC 밸브트레인을 사용하고 있었던 르망의 1.5리터 엔진을 DOHC로 전환한 형태에 가까웠다. 엔진의 재설계는 영국 로터스의 자문을받아 이루어졌다. 91년식 모델부터 탑재되기 시작한 이 엔진은 100마력/5,000rpm의 최고출력과 14.8kg.m/3,400rpm의 최대토크를발휘하여, 동급 대비 강력한 저회전 토크를 강점으로 내세웠다. 이엔진을 탑재한 에스페로는 준중형차 시장의 강자였던 현대 엘란트라와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이 엔진 역시 초기 품질 문제로부터 자유롭지는못했다. 대우자동차의 첫 독자개발에 해당하는 엔진이었던 만큼, 기술적인완성도가 부족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우자동차는 이에 굴하지 않고 꾸준히 차량과 엔진의 품질을 개선하는노력을 통해 시장에 자리잡는 데 성공했다. 이 엔진은 이후 씨에로(넥시아)에도 사용된다.
E-TEC 엔진은 DOHC 뿐만 아니라, SOHC 버전도 존재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신형 소형차라노스에탑재한 1.5리터 SOHC 엔진(A15SMS)이다. 라노스에 탑재된 1.5 SOHC 엔진은 95마력의 최고출력과 14.0kg.m의 최대토크를 발휘했으며, 이 엔진은 후속 모델인 칼로스에도사용되었다.
E-TEC 엔진은 대우자동차의 진정한 독자모델이라 할 수 있는 누비라(Nubira)에도사용되었다. 주력인 세단형 누비라에 사용된 E-TEC 엔진은DOHC 엔진으로, 107마력의 최고출력과 14.3kg.m의 최대토크를 냈다. 후에 등장한 5도어 해치백 버전인 누비라 D5에는 라노스와 같은 SOHC 버전이 사용되었다. 이후 누비라의 페이스리프트 모델인 ‘누비라 II’부터는 엔진에 대대적인 개선이 이루어져 연소 효율이 크게강화되며 뛰어난 연비를 갖게 되었다. 이 당시 대우자동차는 연비는 우수하나 동력성능이 부족했던 현대자동차아반떼의 린번 엔진을 비방하는 내용의 지면광고를 냈다가 공정위의 조사를 받은 적도 있었다.
대우계열의 준중형 승용차 중 E-TEC 엔진을 실은 마지막 모델은 바로 ‘100% 신차’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등장한 GM대우 라세티(Lacetti)였다. 라세티의 심장은 누비라 II에 사용된 E-TEC 엔진을 한층 더 개량한 E-TECH II 엔진으로, 106마력/6,000rpm의 최고출력과 14.2kg.m/4,200rpm의 최대토크를냈다. 이후 소형차 세제가 기존의 1,500cc 미만에서 1,600cc미만으로 확대됨에 따라, 2005년부터는 배기량이 1.6리터로 확대된 사양의 E-TEC II 엔진이 사용되었다. 1.6리터 버전의 E-TEC II 엔진은 109마력/6,000rpm의 최고출력과 15.0kg.m/3,800rpm의 최대토크를 낼 수 있었다. 라세티의E-TEC II 엔진은 동급 대비 풍부한 저회전 토크를 강점으로 내세웠다. 이 엔진은 GM대우의 MPV 모델레조(Rezzo)의 수출형 모델에도 탑재되었다.
범대우계열의 내수 시장용 양산차 중 E-TEC 엔진을 마지막으로 사용한 모델은 2005년 칼로스의 후속모델로 등장한 젠트라(Gentra)다. 젠트라는 칼로스를완전히 대체하는 후속모델이라기 보다는 스킨체인지에 가까운 정도의 변화만 가해진 모델로, 칼로스의 기본설계를 그대로 따른 차다. 젠트라는 출시 초기에는 칼로스 에 사용된1.2리터 엔진과 1.5리터 E-TEC(SOHC)을그대로 사용하고 있었으나, 2006년형부터는 라세티와 동일한 1.6리터DOHC 사양의 E-TEC 엔진도 추가되었다. 젠트라에 사용된 E-TEC II DOHC 엔진은 110마력/6,200rpm의 최고출력과 15.1kg.m/4,200rpm의 최대토크를 냈다. 이 엔진은 2007년 등장한 해치백 버전 ‘젠트라X’에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2000년대중반을 기점으로 쉐보레의 양산차들이 기존 GM대우 모델들을 대체하게 되면서, 젠트라를 끝으로 E-TEC 엔진은 국내 자동차 업계에서 퇴장하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