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 판매된 자동차 중 SUV 및 크로스오버의 판매 비중은 무려 40%에 달했다. 물론 미국 BIG3 브랜드의 픽업트럭 트리오가 여전히 판매량 1,2,3위를 큰 격차로 지키고 있으나 크기를 불문한 SUV들은 엄청난 모델 가짓수에 힘입어 판매량 차트의 상하를 막론한 어디에든 포진하고 있다.
특히 가장 대중적인 모델로 통하는 도심형 컴팩트 SUV, 그 중심에 있는 일본 3사 제품들의 2016년 합산 판매량은 무려 104만 대였다.(혼다 CR-V, 토요타 RAV4, 닛산 로그 합산) 여기에 포드 이스케이프, 지프 체로키 / 컴패스, 마쯔다 CX-5 등과 같은 동급 모델을 합치면 대중차 브랜드들의 도심형 컴팩트 SUV 합산 판매량은 200만 대를 훌쩍 넘는다.
이렇게 미드사이즈 세단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컴팩트 SUV가 미국 소비자들의 '대세' 선택지가 된 와중에 SUV 열풍을 통해 다시금 주목받는 세그먼트가 있다. 바로 대형 럭셔리 SUV 시장이다. 캐딜락 에스컬레이드와 링컨 내비게이터 등이 포진한 해당 카테고리는 2016년 기준 미국 시장 연간 판매량이 13만 8천 대를 기록했다.
이 거대한 덩치들이 위치한 시장은 진입 장벽이 굉장히 높은 곳이다. 브랜드 인지도가 높은 건 둘째치고 높은 대당 단가, 즉 소비자에게 더 많은 돈을 받기 위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브랜드 포지셔닝이다.
캐딜락과 링컨은 이미 오랜 시간에 걸쳐 미국인들에게 '아메리칸 럭셔리' 브랜드로 자리 잡아왔다. 여기에 메르세데스 벤츠는 글로벌 시장에서 쌓아온 높은 브랜드 가치를 활용해 늦게나마 시장에 도전했음에도 성공적인 진입을 이뤘다. 그리고 랜드로버는 오랜 시간 니치 마켓에서 내공을 쌓아온 스페셜리스트였다.
또한 대중차 브랜드의 높은 신뢰도를 기반으로 별도의 럭셔리 브랜드 런칭을 이룬 일본 브랜드의 진입도 눈에 띈다. 각자 토요타 랜드크루저와 닛산 아마다로 대형 SUV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일본 브랜드는 한창 상승세를 이루는 자사의 럭셔리 브랜드 엠블럼을 붙이고 실내 소재 등을 더욱 고급스럽게 꾸며 시장에 내놓았다. 결과는 나름대로 성공적이었고, LX와 QX80은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렇게 SUV를 만들어온 경험과 능력, 그리고 높은 브랜드 가치가 융합되어, 비로소 이 고급스럽고 거대한 덩치들의 시장에 모인 소수 정예들을 보자. 고급 편의장비들을 넘치기 직전까지 꾹꾹 눌러 담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육중한 크기를 자랑한다.
2014년 고작 6대 만이 모인 이 시장의 판매량은 11만 6.082대로 2014년 보다 15.2%가 상승했다. 당시 전체 자동차 시장이 5.9%의 성장세를 보였음을 감안하면 대형 럭셔리 SUV 시장의 판매 증가 폭은 상대적으로 높은 것이다.
이렇게 대형 럭셔리 SUV가 시장에서 다시금 주목을 받게 된 계기 중 하나는 저유가 시대의 도래다. 2014년 중반부터 이뤄진 유가 하락은 다소 주춤거렸던 이 시장에 활기를 되찾게 해주었고, 두 자릿수 판매 증가라는 결과를 이룬 것이다.
아울러 2015년 한해 동안 꾸준히 지속되어온 저유가는 조금 더 거대한 SUV들이 미국 도로에서 활개를 치게 해주었다. 2015년은 다시금 판매량이 대폭 증가하여 13만 4,271대를 기록했다. 이는 2014년 대비 13.6%의 증가세를 보이며 또다시 두 자릿수 판매 증가를 보인 것. 2014년과 마찬가지로 2015년 전체 자동차 시장의 판매량 증가는 5.8%에 불과했다.
그리고 저유가 기조가 여전했던 2016년에는 시장이 커질 대로 커졌다는 것인지 대형 럭셔리 SUV 시장은 2.8%의 성장만 이루어졌다. 그러나 2016년에는 미국 자동차 시장 전체가 성장이 더뎌졌던 시기였다. 따라서 0.4%의 전체 시장 증가세에 비해 대형 럭셔리 SUV 시장은 상대적으로 활기가 돌았다는 것.
2016년에는 노쇠한 링컨 네비게이터가 상품성 저하 및 차세대 모델에 대한 대기 수요 때문에 판매량이 12.9%가 줄었다. 그럼에도 시장의 리더라 볼 수 있는 캐딜락 에스컬레이드가 3만 9천 대를 넘게 팔며 2013년 이후로 줄곧 판매량 상승을 이어왔다. 이와 더불어 판매량 감소를 이룬 렉서스 GX나 레인지로버의 하락폭은 상당히 적어 카테고리 볼륨 상승을 무난히 이룰 수 있었다.
또한 2017년 현재도 대형 럭셔리 SUV 시장이 성장세에 있다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2017년 10월까지의 대형 럭셔리 SUV 시장 판매량은 11만 3,960대로 전년 동 기간 대비 5.3%가 상승했다. 동 기간 미국 전체 자동차 판매량이 1.7% 하락했음을 감안하면 대형 럭셔리 SUV 시장의 저력이 눈에 띄는 대목이다.
아울러 올해를 지나 내년이 더 기대되는 이유도 있다. 해당 시장은 대당 단가가 상당히 높은 곳이지만, 앞서 언급한 조건이 많이 붙는 시장인 관계로 경쟁 모델이 그리 많지 않다. 여기에 미국 전용 시장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지역적 특색도 있어 모델 수명 주기가 상대적으로 긴 편에 속한다.
가령, 현재 모델 체인지를 눈앞에 둔 링컨 네비게이터는 2007년 시장에 발을 들인 3세대 모델이다. 11년의 시간이 지나 이제서야 완전히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 셈이다. 2018년에 상품성 저하로 인해 바닥을 기던 네비게이터의 탈바꿈으로 대형 럭셔리 SUV 시장은 한층 달아오를 것으로 보인다.
이와 더불어 현재 렉서스 GX도 2015년 대규모 페이스리프트를 거쳐 모델 주기가 제법 싱싱한 편이고, 레인지로버는 얼마 전 페이스리프트 모델을 공개한 바 있다.
그리고 인피니티가 11월 중순에 QX80의 마이너 체인지 모델을 내놓으며 분위기 쇄신을 노렸다. 사실 큰 변화는 없으나, 올해 공개했던 모노그래프 컨셉트 디자인을 적용하여 한층 최신 인피니티 모델다운 면모가 눈에 띈다.
그러나 어느덧 데뷔 8년 차를 바라보는 2세대 QX도 단순한 마이너 체인지가 아닌 풀 모델 체인지가 필요해 보인다. 화장을 짙게 발라 주름살은 가렸을지 몰라도, 인테리어는 번잡스러운 기색이 그대로 남아있다.
2019년에는 에스컬레이드와 함께 시장을 이끄는 GLS의 신형 모델이 데뷔하여 대형 럭셔리 SUV 시장을 또 한번 달굴 예정이다. 다만 국제 유가가 2년 5개월 만에 최고치를 찍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시장의 판세를 무시하고 꾸준한 성장을 이뤄왔던 대형 럭셔리 SUV들의 득세가 주춤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대중차 브랜드들도 에스컬레이드나 네비게이터에 필적하는 거대한 SUV들을 미국 시장에 내놓는다. 다만 같은 크기의 자동차에 편의장비 조금 더 얹어주고 고급 소재 좀 사용했다고 2만 달러를 더 받을 수 있는 건 소수의 브랜드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게 브랜드 가치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