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SUV의 역사를 이끌어 온 랜드로버의 플래그십 SUV, 레인지로버를 시승했다. 최근 랜드로버 레인지로버는 5세대로의 세대교체를 이루었으며, 올 하반기 국내 시장에 정식으로 출시된 바 있다. 랜드로버의 새로운 플래그십, 5세대 레인지로버를 시승하며, 그 매력에 빠져들어 본다. 시승한 5세대 레인지로버는 4.4리터 V8 가솔린 터보 엔진을 사용하는 오토바이오그라피(Autobiography) 스탠다드 휠베이스(SWB) 모델로, VAT 포함 차량 기본 가격은 2억 2,437만원(개소세 3.5% 기준)이다.
5세대로 거듭난 랜드로버 레인지로버는 기존의 레인지로버보다 훨씬 커진 차체 크기와 더불어 한층 매끈하고 깔끔해진 외관을 갖추고 있다. 차체의 면면마다 돌출된 부분이 거의 없이 매끄럽게 이어지는 표면과 더불어 각 패널들 사이의 단차 또한 최소화하고 있다. 이는 정통파 SUV보다는 최고급 세단의 작법에 더 가깝다. 이러한 덕분에 상당히 절제되어 있는 느낌을 부여하는 덕분에 최고급 차종으로서의 품위를 지키고 있다. 이는 지나치게 화려함을 추구하고 경향을 보이고 있는 타 브랜드의 신형 최고급 SUV들과 확연히 대비되는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매끄러운 외형을 완성하면서 대형의 SUV임에도 불구하고 0.30Cd에 불과한 낮은 공기저항 계수를 달성했다.
전면부는 한층 매끄러워진 형태임에도 레인지로버로서의 강인한 인상을 최대한 구현해내고 있다. 독특한 수평향의 격자로 구성된 라디에이터 그릴과 더불어 이와 연결되면서 끄트머리를 살짝 늘려 스포티한 인상을 준 헤드램프는 4세대의 이미지를 계승하면서도 일체감이 한층 높아진 것이 특징이다. 하단의 공기 흡입구 또한 크기를 한층 키우는 한 편, 상단과 마찬가지로 단순하면서도 통일성 있는 스타일을 취함으로써 시각적으로 안정된 느낌을 자아낸다.
측면에서는 레인지로버만의 스타일을 완성하는 핵심인 '3개의 선'을 그대로 살려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3개의 선'이란, 차량의 정측면도를 기준으로 상단, 중단, 하단에 위치하는 선을 가리킨다. 상단의 선은 뒤로 갈수록 완만하게 하강하는 루프 라인을, 중단의 선은 차량의 형상을 단단하게 잡아주는 곧고 선명한 어깨 선을, 그리고 하단의 선은 후면으로 갈수록 상승하는 캐릭터 라인을 말한다.
그리고 이 선들을 이어주는 면은 그야말로 한 덩어리의 물질을 통째로 깎아내서 만든 듯한 단순하고 매끄러운 형상으로 빚어져 '절제의 미학'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여준다. 전/후면의 펜더와 도어패널은 마치 한 덩어리에서 나온 듯한 일체감을 이루고 있으며, 상부의 창들 또한, 필러와 창 사이의 경계가 거의 느껴지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 때문에 차량의 상부구조를 실제로 보게 되면 창과 지붕이 한 덩어리로 보일 정도로 높은 일체감을 구현하고 있다. 휠은 22인치, 타이어는 285/45R22 규격을 사용한다.
뒷모습에서는 교량 모양으로 이어져 있는 형태의 세로형 테일램프가 가장 눈에 띈다. 이 테일램프는 가늘고 간결한 디자인으로 빚어져 있으며, 테일게이트 중앙부의 블랙 하이글로스 가니시와 연결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는 신형 레인지로버에서 호불호가 크게 갈릴 요소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극도로 단순한 디자인을 유지하면서 현재의 자동차 디자인에서 상식이 되어버린 수평향의 기조에 따르기 위한 해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 테일램프에는 히든-언틸-릿 라이팅(Hidden-until-lit Lighting) 기술이 적용되어 있다. 작동 시에는 선명한 적색 LED가 점등되지만 작동하지 않을 때는 후면에 글로스 블랙 그래픽의 모습으로 유지된다.
인테리어 또한 외관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깔끔하고 정돈되어 있는 분위기다. 수평향의 대시보드는 최고급 가죽을 아낌없이 사용해 현대적이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로 가득하다. 여기에 새롭게 적용한 13.1" 커브드 플로팅 터치스크린 디스플레이와 더불어 차내 곳곳에 적용된 앰비언트 라이팅, 그리고 간결하게 구성한 점도 레인지로버의 실내 분위기를 더욱 고급스럽게 만들어 준다.
새롭게 적용한 13.1" 디스플레이는 다양한 기능을 제공한다. 높은 해상도와 우수한 터치 반응으로 조작성 면에서 나무랄 곳 없다. 또한 재규어-랜드로버의 최신형 피비 프로(PIVI Pro)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은 기존 대비 개선된 UI와 사용환경을 제공한다. 변속장치는 전자식 레버형을 사용하며, 지형감응장치(Terrain-Response)의 컨트롤러는 여전히 별도의 다이얼을 사용하지만 중앙 디스플레이로도 연동이 되어, 화면 내에서도 설정이 가능하다.
운전석은 최고급 세단이 전혀 부럽지 않을 만큼 편안하고 든든한 착좌감을 자랑한다. 절묘한 경도설정과 최상의 질감을 가진 가죽소재, 그리고 다양한 조절기능이 한데 어우러져 최상급의 착좌감을 선사한다. 시승한 레인지로버의 앞좌석은 요추받침과 머리받침, 사이드 볼스터와 허벅지 받침등을 포함한 24방향의 전동조절 기능을 제공하며, 3단계의 열선/통풍 기능, 메모리, 그리고 '핫스톤' 마사지 기능까지 제공한다. 여기에 운전석과 조수석 모두 별도의 팔걸이를 제공해 최적의 자세를 잡을 수 있도록 한다.
시승한 레인지로버 오토바이오그라피 SWB 모델의 뒷좌석은 의전용으로 사용해도 될 정도로 잘 갖춰진 뒷좌석을 가지고 있다. 공간은 한층 커진 차체 크기를 반영하듯, 스탠다드 휠베이스 모델임에도 충분히 넉넉한 공간을 제공한다. 뒷좌석은 기본적으로 5인승 벤치형 구조이지만 다기능 암레스트와 더불어 뒷좌석 전용의 엔터테인먼트 시스템, 그리고 전동조절 기능과 열선, 통풍, 메모리, 그리고 마사지 기능을 제공한다.
트렁크 공간은 상당한 공간과 더불어 레인지로버 특유의 클램 셸 타입 테일게이트로 우수한 편의성을 제공한다. 상/하로 분리된 클램 셸 테일게이트는 짐을 싣고 내릴 때 상당한 편의성을 제공하는데, 이는 아래로 열리는 하단의 테일게이트가 마치 화물차 적재함의 플랩(Flap)과 같은 역할을 해주는 덕분이다. 트렁크 용량은 시승한 5인승 모델을 기준으로 기본 1,050리터에, 뒷좌석을 접으면 2,335리터까지 확장된다. 이렇게 넉넉한 트렁크 용량을 제공하는 덕분에 다양한 레저활동에 유리하다. 여기에 쇼핑백 등 가벼운 짐을 트렁크 공간 안에 붙잡아줄 수 있는 홀더 기능과 더불어, 뒷좌석 전자동 폴딩 기능, 그리고 이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풀사이즈 스페어타이어를 제공한다.
이번에 시승하게 된 레인지로버는 P530 모델로, 가솔린 V8 4.4리터 트윈터보 엔진을 심장으로 한다. 이 엔진은 독일 BMW와 영국 재규어랜드로버가 공용하고 있는 엔진으로, 530마력/5,500-6,000의rpm 최고출력과 76.5kg.m/1,800-4,600rpm의 최대토크를 제공한다. 이는 추후 출시될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모델인 e510보다도 더 높은 성능이자, 현행 랜드로버 라인업 최강의 파워트레인이라고 할 수 있다. 변속기는 자동 8단 변속기를 사용하며, 구동방식은 당연하게도 사륜구동 방식을 사용한다.
레인지로버는 차량의 시동을 걸고 주행을 시작한 순간부터 남다른 느낌을 준다. 지금까지 경험해 왔던 여느 SUV들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수준의 정숙성과 남다른 느낌의 승차감을 선사하는 덕분이다. 먼저 정숙성의 경우에는 여느 최고급 세단과 비교해도 한 점의 손색이 없다. 파워트레인에서 발생하는 소음 및 진동은 물론, 외부에서 유입되는 소음과 진동 또한 거의 차단되어 있는 수준이다. 심지어는 V8 엔진 특유의 거친 느낌조차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그저 "나 V8이야~"라고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수준의 엔진 구동음만 은은하게 들려 올 뿐이다.
승차감은 레인지로버를 시승하면서 단연 인상깊은 부분이다. 타면 탈수록 '격이 다른' 느낌을 선사하는 덕분이다. 이는 바로 직전의 4세대 레인지로버에서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지만 5세대는 이 느낌이 우월한 정숙성과 만나 더욱 극적으로 느껴진다. 지극히 일상적인 주행의 와중에도 남들과는 다른 차를 타고 있다는 느낌을 차내에 있는 내내 느낄 수 있다. 이는 알루미늄 복합구조로 이루어진 전용의 MLA-Flex 차체구조는 물론, 정통파 SUV의 요소들을 그대로 간직한 차체 설계와 시트 포지션, 그리고 우수한 서스펜션 세팅이 하모니를 이루고 있는 결과라고 본다.
그리고 이 승차감이 더욱 극적으로 느껴졌던 이유는 필설로 다 형용할 수 없는, 레인지로버만의 독특한 질감이 있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어떤 SUV의 승차감이 좋다는 것을 표현할 때, 고급 세단 그것과 종종 비견하곤 하는데, 레인지로버에게는 그러한 접근법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 차는 세단으로부터 파생된 차종이 아니라 태생부터 지금까지 정통 SUV로서 존재해 왔고, 이와 같은 틀을 유지하면서 차근차근 고급SUV로 진화해왔던 모델이기 때문이다. 현재 시장에 쏟아져 나왔던 고급 브랜드의 SUV와는 근본적인 혈통부터 다른 것이다. 높은 시트포지션에, 높은 차체 및 무게중심을 가지는 정통 SUV의 한계점 내지는 특성은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충분 이상으로 안락하고 안정적인 레인지로버의 승차감은 럭셔리 세단과는 전혀 다른 질감의 고급스러움과 편안함으로 다가온다.
V8 4.4 엔진으로 무장한 5세대 레인지로버는 이전 세대 대비 한층 커지고 무거워진 몸집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가속능력을 선보인다. 레인지로버의 4.4 V8 트윈터보 엔진은 이전의 SV에 사용한 550마력 5.0 V8 슈퍼차저 엔진 대비 출력은 소폭 내려갔다. 그렇지만 가속 페달에 힘을 주기 시작하면 한층 막강해진 토크를 바탕으로 맹렬하게 전진을 시작한다. 여기에 일상적인 운행에서는 내내 숨죽이고 있었다가 강렬하게 울려퍼지며 존재감을 내비친다. 강력한 펀치력으로 집채만한 몸집을 거리낌 없이 밀어붙여주는 추진력이 인상적이다.
핸들링 등 조종성능 면에서는 체급 상의 한계가 분명하다. 길이만 5미터 이상에 높이는 1.8미터가 넘는 레인지로버는 확실히 크고 둔중하지만 통제가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정도는 아니다. 비슷한 크기의 미국 출신 대형 SUV보다는 확실히 잘 통제되는 느낌이다. 스티어링 시스템의 조향 응답성도 제법 우수한 편이어서 차를 제어하기 어렵지 않다. 오랫동안 SUV를 만들어 온 랜드로버의 경험과 첨단기술이 빈틈없이 적용된 결과가 아닐까 한다.
이 밖에도 레인지로버는 다양한 능동안전장비들이 탑재되어 있어, 더욱 안전한 운행환경을 제공한다. 시승한 레인지로버 P530 오토바이오그라피 SWB는 선행 차량의 차속에 맞춰서 주행 가능하면서 스톱 & 고(Stop & Go)가 가능한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을 비롯하여 차로 이탈 경고 및 방지 시스템과 사각지대 경고, 후면 교행감지 시스템 등 다양한 장비들이 적용된다. 또한 주차 뿐만아니라 오프로드 주행에서도 도움을 주는 어라운드 뷰 모니터도 기본장비되어 있다.
연비는 대배기량의 V8 엔진을 사용하는 대형 SUV이기에, 썩 좋다고는 할 수 없다. 공인연비는 도심 5.6km/l, 고속도로 9.0km/l, 복합 6.8km/l다. 실제 주행하며 기록된 구간별 평균연비는 도심에서는 5.0km/l 달성조차 쉽지 않지만 고속도로에서는 섣불리 가속페달에 힘 주지 않고 정속주행만 잘 하면 공인연비인 9.0km/l를 그리 어렵지 않게 기록할 수 있었다.
이번에 시승한 랜드로버의 레인지로버는 다른 SUV 모델들과는 '격이 다른' 인상을 심어 준 모델로 기억된다. "클래스가 다르다"라는 말이 이토록 어울리는 차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레인지로버의 시승은 실로 특별한 경험으로 남는다. 과거에 비해 아주 현대적인 외양과 기술로 완성되었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SUV만의 맛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다는 점도 레인지로버를 더욱 특별한 차로 느끼게 만들어 준다. 물론, 세대교체를 하는 과정에서 가격이 상당히 뛰어오르기는 했지만, 지금의 레인지로버는 그 가치를 충분히 하고 있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럭셔리 SUV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