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A(국제 자동차 연맹)가 주관하는 월드랠리챔피언십(World Rally Campionship, 이하 WRC)은 1973년 창설된 이래 지금까지 포뮬러 1, WEC(World Endurance Championship) 등과 함께, 세계에서 손꼽히는 모터스포츠 경기 중 하나다. 현재는 대한민국의 현대자동차도 2014 시즌부터 본 경기에 꾸준히 출전하고 있으며, 현재 포드, 토요타 가주 레이싱과 경쟁하고 있다.
WRC는 세계 각지의 일반 도로는 물론, 임도, 심지어 농로 까지 포함된 다양한 환경의 코스에서 경기를 치른다. 이 때문에 철저하게 통제되어 있는 서킷 안에서만 진행되는 온로드 레이스에 비해 온갖 변수들로 넘쳐나는 극한 환경으로 인해 드라이버에게는 극한의 스트레스로, 갤러리에게는 극한의 긴장감을 선사하며, 그로 인해 드라마틱한 장면들이 많이 연출된다. 이는 WRC가 오랫동안 인기를 끌어 온 요인이기도 하다.
내년을 기해 창설 반세기를 맞는 WRC.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 WRC에서 자동차 제조사로서 가장 많이 승리한 곳은 어디일까? '괴물'이라 불렸던 사륜구동 콰트로를 낳은 아우디일까? 아니면 20년 넘게 무려 10세대의 '랜서 에볼루션' 시리즈를 팔아 온 미쓰비시일까? 그것도 아니면 임프레자 WRX로 유명한 스바루일까? 혹은 최근 승승장구하고 있는 토요타일까? 지금은 떠났지만 오랫동안 WRC에 터를 잡았던 푸조나 시트로엥일까? 정답은 여기 나열된 제조사 중에는 없다. 정답은 저 멀리 이탈리아에 있는 자동차 제조사, 란치아자동차(Lancia Automobiles, 이하 란치아)다.
란치아는 20세기까지만 해도 이탈리아에서 가장 혁신적인 자동차 제조사였다. 란치아는 오늘날 전세계의 자동차 제조사들에 널리 통용되고 있는 기술들을 가장 먼저 상용화한 혁신의 아이콘이었다. 치아는 우리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창립 이래 110년을 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서 깊은 제조사다. 란치아는 피아트(FIAT)의 테스트 드라이버이자 기술자였던 빈센초 란치아(Vincenzo Lancia)가 1906년 토리노에 설립하여 지금까지 역사를 이어 오고 있다. 란치아는 과거부터 유럽에서는 기술력으로 알아주는 자동차 제조사 중 하나였으며, 랠리를 비롯한 각종 모터스포츠 무대에서 획득한 기술을 양산차에 그대로 투입하는 과단성과 우수한 성능으로 유명했다.
란치아가 가장 먼저 시도하고, 오늘날 전세계 자동차 업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기술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모노코크 차체구조', 'V형 6기통 엔진', '전륜 독립식 서스펜션', '5단 변속기', '트윈차저(수퍼차저+터보차저)엔진' 등이 그것이다. 이 외에 란치아만의 독특한 것으로는 양산차 최초의 V형 4기통 엔진과 양산차 최초의 팝업식 리어 스포일러 등이 있다.
이와 같은 일련의 혁신과 더불어, 란치아는 WRC의 출범 초기인 1970년대부터 랠리판을 휘어잡았다. 란치아는 풀비아 이후로도 스트라토스, 037, 델타 등을 잇달아 내놓으며 이어지는 WRC 무대를 휩쓸었고, 드라이버 타이틀은 6회, 그리고 중요한 매뉴팩처러즈(제조사) 타이틀은 무려 10회를 달성했으며, 이 기록은 현재까지도 깨어지지 않고 있다. WRC 무대를 휩쓸었던 란치아의 주요 모델들을 모았다.
풀비아 HF(1963)
이 고풍스러우면서도 컴팩트한 쿠페형 차량은 란치아에게 있어서 기념비적인 모델이다. 란치아는 란치아는 1965년, HF 스콰드라 코르세(HF Squadra Corse) 레이싱 팀을 인수하면서 랠리를 중심으로 한 모터스포츠 활동에 집중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풀비아의 쿠페 모델을 바탕으로 한 경주차로 이탈리아 랠리에서 1965년도부터 1973년도까지 매년 우승을 거머쥐게 된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랠리의 경험을 축적해나가면서 1972년, WRC의 전신이 되는 국제 선수권 대회의 제조사 부문에서 처음으로 우승을 따내며 WRC 전설의 서막을 열었다.
란치아 스트라토스(1973)
이 우주선처럼 생긴 차는 그야말로 뼛속까지 랠리 하나만을 위해 설계된 차로, 란치아의 제조사 종합 우승 타이틀 중 3개를 선사한 차다. 극단적으로 짧은 휠베이스에 MR 레이아웃을 사용해 엄청나게 민첩했을 뿐만 아니라, 디노(Dino) 246GT의 심장이었던 페라리의 2.4리터 V6 엔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성능으로 WRC 무대를 휘어잡았다. 란치아 스트라토스는 1974년 WRC 시즌에 출전하자마자 우승을 거머쥐었고, 75년과 76년에도 우승을 차지하면서 3년 연속 우승의 대기록을 세우기에 이른다.
란치아 랠리 037(1983)
스트라토스와는 달리, 괴상하게 보일 수도 있는 이 차는 본 기사에서 다룰 자동차들 가운데 가장 극적인 스토리를 품고 있는 차다. 그 이유는 1981년 혜성처럼 등장한 '괴물', 아우디 콰트로(Audi Quattro)를 이긴 후륜구동 자동차이자, WRC에서 마지막으로 우승컵을 거머쥔 마지막 후륜구동 자동차이기 때문이다. 막강한 사륜구동 괴물에게 맞서기 위해, 란치아는 스트라토스가 증명한 승리방정식인 극단적으로 짧은 휠베이스와 깃털같이 가벼운 차체, 그리고 강력한 동력성능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랠리 037은 포장도로 구간에서 극심한 언더스티어 경향을 보였던 아우디 콰트로의 약점을 통렬하게 파고드는 한 편, 규정의 허점을 활용해 아우디 콰트로에게 쓰디 쓴 패배를 안겨주게 된다.
란치아 델타(1986)
WRC 최악의 흑역사로 꼽히는 그룹 B가 진행되고 있었던 1980년대, 란치아는 후륜구동 랠리 037으로 아우디 콰트로에게 패배를 안겨주었지만, 뒤 이어 벌어진 경기에서 푸조 205 등의 사륜구동 경쟁자들에 밀리면서 후륜구동의 명백한 한계와 더불어 사륜구동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란치아는 자사의 해치백 소형차인 델타(Delta)를 바탕으로 한 첫 사륜구동 경주차를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이 차가 바로 델타 S4다.
이 차는 1.8리터 가솔린 엔진에 터보차저와 수퍼차저를 함께 결합한, 트윈차저 엔진을 리어미드십으로 탑재하고 여기에 사륜구동까지 맞물려 랠리판을 또 한 번 휩쓸었다. 그러나 1986년 치러진 코르시카 랠리에서 절벽으로 추락하는 사고를 일으키며, 그룹 B와 함께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란치아는 랠리판을 포기하지 않았다. WRC가 그룹 A로 재편되면서 란치아는 델타를 기반으로 하는 경주차, 델타 HF 인테그랄레(Delta HF Integrale)를 출전시켰다. 그리고 1987년도부터 1992년 시즌까지 WRC 무대를 완전히 휘어잡았다. 란치아가 만들어 낸 최후의 괴물과 그 후손들은 무려 5번이나 란치아에게 WRC의 우승컵을 안겨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