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럭셔리 세단의 시조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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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럭셔리 세단의 시조새들
  • 모토야
  • 승인 2022.05.16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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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역사의 시작점인 구미권의 자동차 산업은 19세기 말엽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자동차 산업사는 두 세기를 넘나드는 세월 동안 차근차근 성장해 왔고, 산업으로서 뿐만 아니라, 하나의 역사이자 문화로 자리매김했다.

반면 대한민국의 자동차 산업은 이들에 비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성장 속도만큼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고, 지금은 세계 10대 자동차 생산국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현재 국내의 자동차 산업은 조선,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과 함께 대한민국 경제를 책임지는 제조업의 중추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자동차 산업은 한국전쟁 이래 미군들이 버리고 간 지프 등의 차량 부속을 주워모으고 드럼통을 펴서 차체를 만드는 원시적인 단계부터 출발했지만 한 세기도 되지 않는 시간에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여 오늘날에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자동차 강국으로 우뚝 섰다. 

물론 그 중간에는 원천기술을 가진 해외의 자동차 제조사들을 끌어들여, 그들과 기술제휴를 맺고 그들의 차들을 만들어 왔던 시간이 있었다. 전후 빠른 수복을 이루며 눈부신 경제 성장을 하고 있었던 대한민국을 아시아 시장으로의 진출을 원했던 다국적 기업들이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외국계 기업들과의 제휴로 인해, 대한민국 자동차 시장에는 피아트 124와 같은 소형 승용차부터 신진 크라운 등의 중~대형 세단들까지 출시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국내 고급세단계의 시조새로 일컬어지는 세단 3종을 모았다.

신진자동차 크라운
1967년부터 생산되기 시작한 신진 크라운은 ‘토요타 크라운(Crown)’을 신진자동차가 라이센스 생산한 것이다. 원본이 되는 토요타 크라운은 토요타를 직조기 제작사에서 자동차 제조사로 탈바꿈할 수 있게 해 준 모델이다. 크라운은 당시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가장 크고 고급스러운 승용차로, 국내에서 '부'와 '신분'의 상징으로도 통했다. 처음으로 생산된 신진 크라운은 토요타 크라운의 2세대 모델이었으며, 이후 4세대 모델까지 생산이 이루어진다.

신진 크라운은 뛰어난 품질과 정숙하고 안락한 주행감을 갖췄으며, 심지어 경쟁자조차 없었기에 등장하자마자 빠른 속도로 대한민국의 고급 승용차 시장을 휘어잡았다. 후술할 현대자동차 포드 20M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신모델(3세대)을 빠른 속도로 투입함으로서 왕좌를 더욱 굳건히 했다. 특히 이 3세대 크라운은 신진자동차가 가장 많이 생산한 모델로,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여기에 탄력을 받은 신진자동차는 아예 최신형이었던 4세대 크라운까지 라이센스 생산하면서 고급 승용차 시장을 완전히 틀어쥐게 되었다.

하지만 1974년, 크라운의 부품을 공급하고 있었던 토요타가 돌연 신진자동차와의 제휴관계를 일방적으로 청산해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이는 같은 해 저우언라이(周恩来) 당시 중국 총리가 내건 ‘주4원칙(周4原則)’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대한민국과 중화민국(대만)과 거래하는 기업의 중국진출을 거부하는 조항이 있었다. 그리고 토요타는 중국 시장 진출을 위해 대한민국 신진자동차와의 관계를 끊어버린 것이다. 하루아침에 전 라인업이 통째로 증발해버린 신진자동차는 경영악화로 산업은행의 관리 하에 들어가게 되어 새한자동차, 거화자동차 등으로 분할된다. 그리고 1978년, 새한자동차는 대우그룹으로, 거화자동차는 동아그룹으로 넘어갔다가 후일 쌍용그룹에 합병되며 훗날 대우자동차와 쌍용자동차로 거듭나게 된다.

현대자동차 포드 20M
현대자동차의 대표적인 고급 승용차로 손꼽히는 모델이 있다면 바로 그랜저다. 하지만 이 그랜저보다 한참 먼저 만들어진, 현대자동차 역사 상 첫 고급 승용차는 포드의 20M이다. 포드 20M은 당시 유럽 포드가 생산하고 있었던 타우누스 20M(Taunus 20M)을 현대자동차가 라이센스 생산한 것이다. 1968년, 유럽포드의 중형 승용차 코티나(Cortina)를 생산한 것을 시작한 이래 불과 1년 만에 추가된 현대자동차의 두 번째 모델이기도 하다.

현대자동차가 생산한 포드 20M은 4,721mm의 길이와 1,756mm의 폭, 그리고 1,478mm의 높이를 가진 세단형 승용차로, 당대 국내에서 생산된 세단 중 가장 큰 덩치를 자랑했다. 또한 유럽 포드의 고급 승용차 모델을 기반으로 한 만큼, 크라운과는 또 다른 감각을 뽐내는 외관 디자인은 건장한 체구와 함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자동차 자체가 부의 상징이었던 시절에 나타난 포드 20M은 유럽 스타일의 감각적인 스타일과 더불어 뛰어난 성능과 우수한 편의장비를 고루 갖췄다.

하지만 한 가지 약점이 있었는데, 바로 신진 크라운보다도 비싼 '가격'이었다. 포드 20M의 1968년 당시 출시 가격은 184만 6천원이었는데, 당시 서울 변두리의 주택 가격이 7~80만원 선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시쳇말로 ‘집이 몇 채 굴러 다니는’ 수준의 가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감각의 고급 승용차를 원했던 소비자들로부터 호응을 얻으며 신진 크라운을 위협했으며, 1973년 단종에 이르기까지 총 2,406대가 생산/판매되었다. 포드 20M의 빈 자리는 후일 등장한 포드 그라나다가 물려받게 된다.

기아산업 푸조 604
기아는 현대자동차나 구 신진자동차에 비해 고급 승용차의 도입이 많이 늦었다. 신진자동차와 현대자동차가 60년대에 이미 고급 승용차를 내놓았던 것과는 달리, 기아(당시 기아산업)는 1978년에서야 비로소 고급 승용차를 내놓게 된다. 당시 현대자동차는 포드 20M의 뒤를 이어 포드 그라나다로, 신진자동차의 후신인 새한자동차는 GM과의 연계를 통해 들여 온 오펠 레코드로 고급 승용차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당시 기아는 일본 토요공업(現 마쯔다)과 기술제휴 관계에 있었으나, 이 당시 토요공업을 통해 들여오고 있었던 차종은 주로 중소형 상용차종에 국한되어 있었고, 승용차 모델은 브리사와 당시 인수한 아시아자동차에서 생산한 이탈리아 피아트(FIAT)의 132 정도가 전부였다. 이러한 가운데 기아자동차가 들여 온 차가 바로 푸조 604였다. 푸조 604는 푸조가 제 2차 세계대전 이전에 만들었던 601 이래 처음으로 새로 개발한 대형 고급 승용차로, 일 BMW나 메르세데스-벤츠의 고급 승용차와 경쟁하기 위해 개발된 차량이다. 푸조 604는 피닌파리나가 빚은 늘씬하고 세련된 스타일의 외관에 우수한 성능의 V6 PRV 엔진, 뛰어난 제동성능, 그리고 우수한 주행성능을 자랑했다. 

기아는 1979년 3월, 이 푸조 604를 "뿌조 604"라는 이름으로 전격 출시하며 고급 승용차 시장으로의 진출을 선언했다. 기아는 이 차를 직도입하지 않고, 프랑스 푸조로부터 라이센스를 받고 생산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한 실패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먼저 차량의 가격이 문제였다. 1979년 당시 기준으로 푸조 604의 가격은 2,300만원에 달했다. 이는 당시 국내에서 가장 비싼 가격이었다. 1979년 당시 대치동 은마아파트의 분양가가 대략 2천만원이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집이 굴러다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여기에 1978년 말, 오일쇼크로 인해 장관급 관용차를 4기통으로 제한하면서 사전에 푸조 604를 계약한 물량이 줄줄이 취소되는 사태마저 벌어지며, 푸조 604는 현대자동차의 포드 그라나다와 함께 애물단지가 되었고, 1981년에는 신군부 세력이 주도한 자동차공업 통합조치로 인해 출시 3년도 채 되지 않아서 강제로 단종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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