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PSA(푸조-시트로엥) 그룹과 르노 그룹은 오늘날 프랑스를 대표하는 거대 자동차 기업집단이다. 프랑스 푸조는 1810년 세워진 푀조 가문의 철공소로부터 시작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기업이며, 르노 또한, 자동차산업의 초창기인 1899년에 사업을 시작해 다양한 기술혁신을 선보여 온, 전통 있는 자동차 기업이다.
하지만 이들 기업의 색깔은 확실히 다르다. 프랑스 제조사 고유의 특색이 드러나는 점들은 공통분모라고 할 수 있으나, 디자인에 대한 접근법부터 추구하는 엔지니어링의 방향성에 이르는 모든 면에서 다른 면모를 보인다. 그리고 이들 기업집단은 프랑스의 국토가 나치독일에 의해 유린 당한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서로 다른 행보를 보였다.
경영과 고용 유지를 위해 변절을 선택한 르노
르노의 공동 창업주 루이 르노(Louis Renault, 1877~1944)는 제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점에서는 당당한 애국자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그는 프랑스군을 위해 새로운 '전차(Tank)'를 개발했는데, 이 전차가 바로 현대적인 전차의 효시로 통하는 'FT 전차(Char Renault FT)'다. 루이 르노는 전시상황이었던 당시 이윤의 추구 대신 프랑스군에게 더 많은 FT 전차를 공급함으로써 프랑스의 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전장에서 맹활약을 펼친 FT 전차는 주변국인 스페인,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는 물론, 핀란드, 폴란드, 리투아니아, 터키, 심지어 미국에도 수출이 이루어진 베스트셀러 전차가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프랑스군을 위해 혁신적인 전차를 개발하고 생산하는 데 앞장섰던 르노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변절'을 하게 된다.
르노가 나치독일에 협력한 것은 나치독일의 프랑스 침공이 매우 빠른 속도로 전개되면서 르노의 자동차 공장이 소재했던 지역이 모두 나치 독일의 손에 넘어 간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 당시 루이 르노는 나치독일의 공세가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는 것을 보고 이 전쟁이 지난 전쟁만큼 오래 끌지는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자사의 경영 및 고용 유지를 위해 나치독일의 요구에 따르게 된다.
르노는 나치독일 치하의 다임러와 벤츠 등의 자동차기업에서 파견한 노동자들을 채용하는가 하면, 나치독일군이 사용하게 될 수송용 트럭을 생산했다. 르노는 "전차를 생산하라"는 나치독일의 요구에는 따르지 않았지만, 군대를 위한 수송용 트럭을 생산한 시점에서 이미 그는 나치와 손을 잡은 것에 다름 아니게 되었다. 르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독일군에 총 32,000여대의 차량을 공급했다.
이 때문에 비양쿠르에 소재한 르노의 자동차 공장은 당시 프랑스의 저항군 레지스탕스들에게 테러를 당하는가 하면, 연합군에게 주요 전략 목표물로 인식되어 1942년, 영국군의 폭격을 받아 공장이 파괴되었다. 이 날의 폭격으로 인해, 비양쿠르 공장은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게 되었고, 루이 르노 본인은 이 때의 충격으로 인해 실어증에 걸리기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 피해를 복구한 지 1년이 조금 지난 1943년, 미군의 폭격기들에게 두 차례에 걸친 폭격을 얻어맞아 또 다시 파괴되었다.
그리고 전쟁은 루이 르노 루이 르노의 예상과는 달리, 몇 년을 질질 끌었다. 그의 행동은 자신을 겨누는 칼이 되어 돌아 왔다. 종전 후 샤를 드 골이 이끄는 프랑스 정부는 루이 르노에게 나치독일에 부역한 죄를 물어 감옥으로 보냈고, 1차 대전 이후 받은 레지옹 도뇌르 훈장까지 몰수했다. 루이 르노는 결국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그가 세운 르노자동차는 르노 일가에게는 단돈 1프랑의 보상도 없이 곧바로 국유화되기에 이른다. 이 때문에 오늘날 프랑스 파리에는 시트로엥의 이름을 딴 거리나 공원은 있어도, 르노의 이름이 붙은 공원이나 기념물은 없다고 한다.
생명을 지키기 위해 희생을 선택한 푸조
반면, 푸조의 경우에는 르노와는 정 반대의 행보를 보였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은 푸조의 공장 역시 접수한 상태였는데, 이 당시 경영을 맡고 있었던 장 피에르 푀조 3세(Jean-Pierre III Peugeot)는 루이 르노와는 달랐다. 그는 처음에는 나치독일에 직접적으로 항거하지는 못했지만, 한 사건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나치독일에 저항한 인물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그것을 결정하는 데에는 점령군에 대한 저항이 아닌, 회사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던 소쇼(Sochaux) 지역 주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고자 했던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독일이 프랑스 전역을 빠른 속도로 마무리지으면서 소쇼에 위치한 푸조 공장은 곧바로 독일에 접수되었다. 당시 푸조의 소쇼 공장은 무려 6만 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었던 대단위 공장이었고, 지역경제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 때문에 푸조 역시, 르노와 마찬가지로, 자사 경영과 고용 유지를 위해 나치의 요구에 정면으로 대항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루이 르노가 비교적 적극적으로 나치에 협력한 것과는 달리, 푸조는 최대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예를 들어 독일이 트럭생산을 요구하면, 생산분 10대 중 6대를 불량품으로 납품하는 등의 방식으로 나름의 '방해공작'을 벌인 것이다.
이 당시 푸조 공장이 독일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은 연합군에서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연합군은 이미 소쇼의 푸조 공장을 폭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43년, 나치독일이 V1 로켓을 생산하는데 푸조 공장의 숙련공들을 강제로 차출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푸조공장의 인력이 V1 로켓 생산에 투입되고 있는 것을 알아 챈 연합군은 소쇼 공장에 대한 폭격을 서둘렀다. 하지만 1943년 왕립공군의 지휘로 이루어진 소쇼 공장 폭격에서 푸조의 공장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연합군의 폭격기가 소쇼 공장이 아닌, 소쇼 공장 인근의 4개 마을을 폭격해버리는 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 비밀리에 파견되어 있었던 영국인 요원이 장 피에르 푀조 3세의 동생인 로돌프 푀조(Rodolphe Peugeot)에게 연락을 넣어, 폭격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를 막기 위해 공장을 직접 폭파시켜달라는 요청을 하게 된다.
장 피에르 푀조는 난감했다. 공장을 유지하면 연합군 때문에 지역 주민들이 희생될 것이 불 보듯 뻔했고, 공장을 파괴하면 그동안 가문 대대로 일궈 놓은 것들을 자신의 대에로 무너뜨리는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민 끝에, 자사 공장을 파괴하는 것이야말로 지역 주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수락했다. 그리고 이들은 회사의 기반인 공장을 스스로 파괴한 것은 물론, 재고로 쌓인 부품들까지 수일에 걸쳐 모조리 파괴하여 나치 독일이 재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또한 이들은 영국의 첩보 기관에 정보를 제공하거나 V1 로켓의 동체제작 설계도를 연합군에 넘기는 등으로 독일을 괴롭혔다.
이 때문에 나치독일은 장 피에르 푀조 3세를 체포하고 그에게 총살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페르디난트 포르쉐의 개입으로 인해 그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물론 이 때문에 푸조는 모든 것을 '0'에서 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지만, 프랑스의 자동차 업계에서 나치독일에 자사공장을 폭파시켜가며 저항한 '애국자'로 남게 되었다.
프랑스 자동차 업계의 애국자, 시트로엥
1979년 이래 푸조와 한 지붕이 된 시트로엥 또한, 프랑스 자동차 업계의 '애국자'다. 시트로엥은 나치에게 철저하게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시트로엥의 경영진은 이미 생산한 자동차들을 폐기 혹은 은닉했다. 여기에는 이미 자사가 생산한 자동차들이 나치독일에 넘어가는 것을 막고, 그들이 자사의 자동차 개발 기술을 빼앗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시트로엥이 이렇게 나치독일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시트로엥을 경영하고 있었던 피에르-쥘 불랑제(Pierre-Jules Boulanger)의 영향이 컸다. 1950년 타계하기 전까지 회사의 경영을 맡았던 그는 이전부터 점령군인 나치 독일에게 비협조적이기로 유명했다. 그로 인해 시트로엥은 독일의 그 어떤 기술자와도 중계인을 통하지 않으면 접촉 자체를 거부했다. 장 피에르 푀조 3세를 살려준 그 유명한 페르디난트 포르쉐 조차 이들과는 직접 접촉할 수 없었다고 한다.
물론 시트로엥 역시, 자동차 제조사였기 때문에 나치독일이 일방적인 트럭 생산을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시트로엥은 독일군에 납품할 트럭 생산 라인에서 의도적으로 태업을 벌여 납기를 질질 끄는 방식으로 독일군의 속을 끓게 만들었다. 심지어 종전 후 파리 소재의 게슈타포 사무소에서 발견된 문건 중에는 피에르-쥘 불랑제의 이름이 1순위로 적어 놓은 블랙리스트가 발견되기도 할 정도였다.
이렇게 나치독일에 비협조적으로 나간 시트로엥은 심지어 나치 독일의 눈을 피해 몰래 신차를 개발하기도 하는 대담함까지 보였다. 이 암울하기 짝이 없던 시기에 개발된 차들 중에는 바로 그 유명한 '2CV'와 더불어, 소형 상용차 'H 밴(H Van)', 'DS'가 있다. 자동차 제조사로서 나치에 적극적으로 저항한 시트로엥은 전후 프랑스에서 높은 브랜드 로열티 효과를 누리게 되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