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5위의 자동차 생산국인 대한민국. 그렇다면 지금 우리나라에서 생산되고 있는 자동차들 중에서 우리말, 혹은 우리말에서 유래한 이름을 사용하는 자동차는 몇 대나 될까? 유감스럽게도, 규모가 큰 완성차 업체에서 현재 우리말 이름을 사용하는 차는 단 한 대도 없다. 과거에는 존재했었지만 현역으로 뛰고 있는 모델들 중에 우리말 이름이 붙어 있는 차는 전무하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이 실로 무색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과거에 존재했던 우리말 이름 자동차들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적어도 국내 자동차 산업의 초기에는 우리말 이름으로 된 차들이 많았다.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의 첫 발을 내딛었던 국제차량제작의 시-발부터가 어떤 것이 시작하는 시점을 의미하는 한자어 시발(始發)에서 가져 온 것이다. 그리고 국제차량 제작은 이 이름을 자사가 생산했던 버스에도 그대로 붙였다. 이 외에 신진공업에서 제작한 신성호도 존재한다.
심지어 국내서 생산하지도 않았던 차량임에도 우리말 이름이 붙은 사례도 있었다. 바로 새나라자동차다. 하지만 이 차의 작명은 다분히 정치적 프로파간다의 의도가 담겨 있다. 이 차의 정체는 닛산의 소형 승용차 블루버드로, 새나라자동차 사업 당시 이 차를 국내서 조립 생산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실상은 온갖 비리와 범죄로 점철되었다. 국내 생산은 커녕, 일본에서 생산된 '완성차'를 명목 상 관광용으로 들여와 면세혜택은 전부 챙기고 정작 이를 일반 택시 업자에 분양해 100%에 달하는 마진을 붙여 판매하는 등, 막대한 탈세와 부당 이득, 그리고 그 부당 이득 중 일부가 박정희 대통령의 정치 자금으로 쓰였다는 의혹으로 번진 것이다. 새나라자동차 사건은 이제 막 싹을 틔우고 있었던 국내 자동차 산업을 정부가 나서서 짓밟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 이후로 국내 자동차 업계에서는 우리말 이름을 사용하는 차가 줄어들었다.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제대로 된 독자 모델도 없었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다. 심지어 대한민국 최초의 독자개발 모델임 포니 조차, 조랑말을 뜻하는 영단어 포니(Pony)에서 가져 온 것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에 우리말 이름을 사용한 사례가 등장한다. 바로 새한자동차(이후 대우자동차)에서 생산했던 승용차 모델 '맵시'였다. 맵시는 '아름답고 보기 좋은 모양새'를 의미하는 우리말이다. 맵시는 이스즈의 승용차 모델 제미니(Gemini)를 라이센스 생산한 모델이지만, 이름만큼은 우리말 이름을 사용해 국내 소비자들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새한자동차가 대우자동차로 넘어간 이후에 등장한 페이스리프트 모델에는 '두 번째 맵시'라는 의미로 '맵시-나'로 명명되었다.
또 다른 사례는 1990년대 들어 등장한다. 1990년대는 자동차 산업의 초창기에 이어, 우리말 이름을 사용한 차들이 가장 많이 등장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 첫 번째 타자는 舊 쌍용자동차(現 KG모빌리티)에서 생산되었던 고급 SUV 모델 '무쏘(Musso)'가 그 주인공이다. 무쏘는 코뿔소를 의미하는 우리말 단어 '무소'를 된소리화시키는 변형을 거친 작명으로, 코뿔소처럼 강인하고도 듬직한 차량의 이미지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옳게 된" 작명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 타자로 등장한 모델은 대우자동차의 '누비라(Nubira)'다. 이는 故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직접 지어 준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름 그대로 "세계를 누비라"는 의미로 지었다고 한다. '세계 경영'을 외치던 그의 바람과 포부가 깃들어 있었던 이 이름은 무쏘와 함께 우리말 자동차 이름의 가장 좋은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이름은 대우그룹이 붕괴되고 난 이후에도 2000년대까지 살아 남아 범 대우계열의 준중형 세단의 수출명으로 두고두고 사용되었다.
또 다른 사례로는 비교적 나중에 자동차 산업에 뛰어든 舊 삼성자동차(現 르노코리아자동차)에서 출시했던 '야무진'이다. 삼성 야무진은 당시 기술제휴 관계에 있었던 닛산(Nissan)의 1.2톤급 화물차 아틀라스(Atlas)를 국내 사정에 맞게 일부 개수를 거쳐 라이센스 생산한 모델이다. 차명인 야무진은 "어수룩함이 없이 올차고 똑똑하다"를 의미하는 '야무지다'를 형용사화한 것으로, 현장의 최일선에서 활동해야 하는 상용차로서 실로 적절한 작명이다.
하지만 이 이후로 국내 완성차 업계에서는 그나마 하나둘씩 보였던 우리말 작명이 모조리 사라진다. 물론, 비교적 최근에는 파워플라자의 '예쁘자나 R', 대창모터스의 '다니고' 등, 일부 초소형 전기차에 우리말 이름이 사용되고는 있다.
또한 국내에서 가장 많은 자동차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현대자동차, 그리고 2위 제조사인 기아는 창사 이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우리말 이름을 자사의 양산차에 사용한 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전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현대자동차그룹의 고급 브랜드인 제네시스는 아예 완전히 서구식의 알파뉴메릭 작명을 사용하기 때문에 더더욱이 볼 일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들이 우리말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돈'이다. 특히나 자동차는 반도체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 제조업의 주요 '수출품'이기 때문에, 세계 각국에 퍼져 있는 '고객'의 입맛에 맞춰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것을 구시대적이고 세련되지 못한 것으로 여겼던 시장의 분위기를 따라, 기업들이 우리말 이름 사용을 꺼렸던 점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가 아닌, 다른 아시아권 국가는 어떨까? 먼저 우리보다 일찍 자동차 산업을 시작한 일본의 경우를 보면, 적어도 대한민국 보다는 자국어를 활용한 작명에 덜 인색한 편이다. 예를 들어, 토요타자동차의 대표적인 중형세단 모델 캠리(Camry)의 사례를 보면, 일본어로 왕관을 의미하는 '칸무리(冠, かんむり)'를 적당히 변형시킨 것이고, 이 이름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또한 자사의 수소연료전지차(FCV) 모델인 미라이는 아예 일본어로 '미래'를 의미하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또 다른 사례로는 해외에서 인피니티 Q70으로 판매하고 있는 닛산 푸가(Fuga)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이 이름은 서양의 음악용어 푸가(Fuga)에서 가져 온 것으로 보여지지만, 본래는 '풍류와 문아(文雅)을 아울러 이르는 말'인 풍아(風雅)의 일본어식 음독이 음악용어 푸가와 유사하다는 것을 이용한 작명이다. 또한 미쓰비시자동차의 경차 모델 eK의 경우에는 겉으로는 그저 로마자를 사용한 작명 같지만, 일본어식으로 읽게 되면 '좋은 경차(いい軽)'가 되는 것을 이용한, 꽤나 교묘한 작명이다.
그렇다면 중국 쪽은 어떨까? 이 곳은 오히려 외래어 작명보다 자국어 작명이 더 우세한 편이다. 자동차 산업 성장기에는 내수시장이 주류였고, 무엇보다도 외래어에 깐깐한 중국어의 구조적인 한계로 인해, 자국어 차명을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근래 들어 중국의 자동차 업계가 자사의 모델들을 적극적으로 해외 수출길에 올리면서 서구식의 알파뉴메릭 작명과 더불어 외래어 작명을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다.
이렇게 아시아의 자동차 업계가 자국어를 직간접적 활용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에 반해, 국내의 자동차 업계는 여전히 우리말 이름에 박하다. 특히 현대차그룹이 국내 자동차 업계를 완전히 장악하고 나서부터는 더더욱이 그렇다.
하지만 이제는 대한민국의 이름과 위상은 지난 날에 비하면 비교도 할 수 없이 높아졌다. 아직도 산업화의 도상에 있었던, "그 때 그 시절"의 대한민국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언어라는 것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정서를 가장 직접적으로 담고 있는 요소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국내 완성차 업계가 다시금 우리말을 활용한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고려해봐도 좋은 때가 아닐까 한다. 머지 않은 미래에 우리말 이름을 사용한 자동차가 등장, 혹은 부활하는 장면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