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차를 딱지만 바꿔 판다고? - 배지 엔지니어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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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차를 딱지만 바꿔 판다고? - 배지 엔지니어링 이야기
  • 박병하
  • 승인 2022.10.13 18: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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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자동차을 개발하고 생산하는 데에는 엄청난 자본과 기술을 필요로 한다. 대량 생산을 하는 일반적인 완성차 제조사는 하나의 차량을 새롭게 개발하는 경우에는 적게 잡아도 수백억, 많게는 수천억원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자금이 투입된다. 이 때문에 자동차 제조사에게 있어서 신차를 개발하는 것은, '신제품 개발'이라는, 제조업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상당한 수준의 위험 부담을 끌어 안아야 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따라서 세계의 거대 글로벌 자동차 제조사들은 설계 기반에 해당하는 플랫폼을 시작으로 많은 부분을 공용화하면서 신차 개발에 요구되는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게 되면, 아예 '차량' 자체를 공용화하는 단계까지 이르게 되기도 한다. 즉, 동일한 차량에 서로 다른 제조사들의 배지(엠블럼)를 붙이고 이를 해당하는 제조사들이 각각 판매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자동차 기업집단에서 하나의 신차를 개발하고 이를 3개의 계열사들에게 각 계열사의 배지를 붙여서 판매하게 하면, 개발한 차종은 1개 차종이지만 사업적으로는 3개의 차종을 개발하게 되는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동일한 차량에 서로 다른 제조사의 배지를 붙이는 행위를 두고 배지 엔지니어링(Badge Engineering)이라고 부른다. 배지 엔지니어링은 "배지 하나만 바꿔 다는 수준의 엔지니어링(Engineering)"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지만, 일각에서는 실질적으로 '엔지니어링'이라 할 만한 작업이 거의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리뱃징(Rebadging)'이라는 단어를 더 선호하기도 한다.

자동차의 배지 엔지니어링은 의외로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배지 엔지니어링의 시작은 전세계에서 자동차가 가장 빨리 대중화된 나라인 미국이다. 지금으로부터 1백년도 더 된, 1918년, 미국의 자동차 회사 엘카트(Elkhart)가 개발한 엘카(Elcar)를 텍산 자동차(Texan automobile)가 조립을 하면서 여기에 자사의 엠블럼을 붙인 것이 최초의 사례라고 전해진다.

이러한 배지 엔지니어링은 미국에서 특히 성행했는데, 이 '배지 엔지니어링의 화신'과도 같은 기업이 바로 미국을 대표하는 자동차 기업집단인 제너럴 모터스(General Motors, 이하 GM)다. 이는 GM이라는 기업 자체가 미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제조업체들을 차례차례 인수합병하는 방식으로 성장해 온 덕분에 산하에 수많은 계열사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래서 GM은 이를 통해 배지 엔지니어링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즉, GM이 하나의 승용차를 개발하게 되면, 그 차는 쉐보레 브랜드는 물론, 뷰익, 캐딜락, 그리고 지금은 없어져 버린 오클랜드(Oakland Motor Car Company)나 올즈모빌(Oldsmobile), 폰티액(Pontiac) 등의 엠블럼을 달고 판매되는 식이었다. 물론, 어떤 제조사의 배지를 다는가에 따라, 약간의 외형적인 차이나 편의사양 등의 차이는 존재했지만 사실 상 동일한 차량을 여러 채널로 판매하며 이익을 극대화한 것이다. 

이러한 사례 중 가장 극단적인 사례로는 1982년 등장한 1세대 쉐보레 캐벌리어를 꼽을 수 있다. 쉐보레 캐벌리어는 GM J플랫폼 기반의 전륜구동 중형세단으로, 개발은 쉐보레가 전담하였으나 이 차는 쉐보레 브랜드 외에도 캐딜락 시마론, 뷰익 스카이호크, 올즈모빌 피렌자, 폰티액 썬버드, 오펠 아스코나, 복스홀 카발리에, 이스즈 아스카, 홀덴 카미라 등 무려 9개사의 배지를 달고 판매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는 기술의 혁신과 합리적인 가격, 우수한 상품성으로 승부를 보려 했던 일본 자동차 업계의 맹공에 대항하기 위해 GM의 배지 엔지니어링이 거의 무분별한 수준으로 이루어지던 시절이었으며, 이 때문에 제품간 차별성은 떨어지고, 상품성마저 덩달아 악화되면서 부진의 늪에 빠지게 된다.

특히 GM이 1980년대에 행한 무분별한 배지 엔지니어링으로 인해 부진을 면치 못하게 되자, GM의 산하에 있었던 수많은 브랜드들이 사라지게 되고, 오늘날의 GMC, 쉐보레, 캐딜락, 뷰익의 4개 브랜드만 남게 된다. 이는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시장의 요구에 맞춘 신제품 개발과 품질 개선 등, 시간과 비용을 필요로 하는 일을 등한시 하고 극도의 원가절감책으로 이를 해결하러 들었기에, 미국의 소비자들로부터 외면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배지 엔지니어링은 위와 같이 어두운 면도 존재하지만, 자동차 제조사의 입장에서는 잘만 활용한다면 여러가지 이점을 볼 수 있다. 배지 엔지니어링은 서두에 언급한 '막대한 비용절감 효과'와 '판매망 확대 효과' 외에도 여러 이로운 효과를 볼 수 있다. 특히 성격이 전혀 다른 제조사들이 제휴를 맺고 서로의 장점은 살리면서 단점을 보완하는 사례가 있다. 1990년대의 혼다기연공업과 이스즈자동차의 관계가 그것이다. 현재 혼다는 크로스오버 SUV인 CR-V와 파일럿 등의 모델이 잘 팔리고 있지만, 이 당시까지만 해도 SUV 라인업이 매우 빈약했었고, 이스즈는 승용차 라인업이 부실했다. 이에 양사가 전략적 제휴를 통해, 이스즈의 SUV 모델들에 혼다 및 아큐라(Acura)의 엠블럼을 붙이고, 혼다의 승용차 모델들에 이스즈의 엠블럼을 붙여서 서로의 부족한 점들을 보완해 나갔다.

또 다른 이로운 효과로는 자동차를 수출/입하는 경우에서 나온다. 이러한 경우는 주로 수출을 목표로 하는 국가에 이미 자회사(혹은 자매회사)가 진출해 있거나, 제휴관계를 맺은 자동차 제조사가 존재하는 경우에 나타난다. 크라이슬러 300C가 그 예 중 하나다. 크라이슬러는 유럽 시장에 300C를 판매하기 위해 자매회사인 란치아와 협력하여 300C에 란치아 배지를 붙여서 란치아 테마(Lancia Thema)로 판매했었다. 이 유럽 버전의 300C는 국내에서도 FCA코리아를 통해 300C 디젤 모델로 들여오기도 했다. 이 외에도 GM대우 시절 생산했던 '윈스톰 맥스(Winstorm MAXX)' 유럽에서는 오펠(Opel) 브랜드로, 영국에서는 복스홀(Vauxhall) 브랜드로, 미국에서는 새턴(Saturn)과 GMC 브랜드로, 호주에서는 홀덴(Holden)의 엠블럼을 달고 판매되었다. 이 뿐만 아니라 GM대우 시절 생산되었던 많은 차량들이 홀덴이나 쉐보레의 배지를 달고 전세계 시장에 수출되었다.

또한 같은 국가지만 지역적인 특수성으로 인해 배지 엔지니어링이 성행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일본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주로 경차 모델들을 대상으로 한 배지 엔지니어링이 행해진다. 현재 일본 내 완성차 제조사 11개사 중에서 자체적으로 경차를 개발 및 생산하는 제조사는 스즈키, 다이하츠, 혼다, 그리고 미쓰비시의 4개다. 승용차를 생산하지 않는 히노와 이스즈, 그리고 고급 브랜드인 렉서스를 제외하면, 토요타, 닛산, 스바루, 마쓰다의 나머지 4개사는 자체적으로 경차를 개발 및 생산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각각의 제휴관계를 통해 앞선 4개사 중 혼다를 제외한 3개사로부터 경차 모델을 공급받는다. 토요타와 스바루는 한 지붕 식구인 다이하츠에게, 닛산은 미쓰비시로부터  얼라이언스 관계가 되기 전부터 경차 모델을 공급받고 있으며, 마쓰다는 스즈키로부터 경차 모델을 공급받는다.

일본에서는 이렇게 실제로 뱃지만 바꿔 단 채 다른 제조사로 납품하는 것을 두고 'OEM공급'이라 표현하는데, 경차 뿐만 아니라 승용차 모델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이러한 방식으로 판매되고 있다. 일본의 경우에는 지역색이 강해, 지역 토박이 기업들의 제품을 구입해주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큰 비용이 드는 자동차의 경우에 이러한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편이다. 마치 대한민국의 울산광역시에서 현대자동차의 점유율이 높은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한 편이다. 예를 들어 마쓰다의 경우에는 지난 2021년 기준으로 일본 전국 내수 시장 점유율은 고작 3.5%에 불과하지만, 고향인 히로시마 일대에서는 점유율이 비약적으로 올라간다. 토요타는 전국적으로도 절반이 조금 안 되는 점유율을 가지고 있지만, 연고지인 아이치 현 일대가 '토요타의 영지'로 불릴 정도로 절대적인 점유율을 보인다. 이러한 경우, 자사가 직접 개발 및 생산하지 않는 카테고리의 차종을 다른 제조사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다면 양자가 서로 이익이기에 이러한 방식이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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