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B가 낳은 '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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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B가 낳은 '괴물'들
  • 박병하
  • 승인 2022.08.01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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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C(World Rally Championship)의 대표적인 흑역사로 거론되는 그룹B. 그룹B는 더 느슨한 규정을 통해 더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연출하고 더 많은 제조사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클래스였다. 그룹B는 공차중량 1톤 미만의 차체를 제외하면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개조, 그리고 단 200대의 연간 생산 대수로 호몰로게이션을 취득할 수 있는 파격적인 규정으로 구성되었다. 그룹B는 1982년도부터 시험적으로 운영되다가 1983년부터 본격적으로 그 불씨를 지피게 된다.

그룹 B는 공차중량 1톤 미만의 차체에 500마력의 최고출력 제한, 그리고 탑클래스에 해당하는 그룹4의 절반에 불과한, 단 200대의 연간 생산 대수로 호몰로게이션(인증절차)을 취득할 수 있는 파격적인 규정을 내걸었다. 이 때 등장한 차들은 하나같이, 그 당시의 광기를 상징하는 모델들로 남아 있다. 그룹 B가 낳은 괴물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자.

푸조 205 터보 16 Evolution 2(1984)
이 차는 그룹 B가 한창인 1985년도에 등장해서 그룹 B의 마지막인 1986년도까지 달렸던 괴물 머신으로, 1984년 완성된 205 T16을 더욱 강력한 파워를 더했다. 푸조 205 T16 Evolution 2는 작고 총충량 900kg 이하의 가벼운 차체에 500마력을 넘나드는 강력한 터보 엔진을 리어미드십으로 탑재하고 여기에 사륜구동 시스템을 결합해, 뛰어난 성능을 보이며, 1985~1986 시즌 내내 맹활약을 펼치며 드라이버 타이틀은 물론, 컨스트럭터 타이틀까지 따내는 대업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푸조 205 T16은 1986년, 후술할 다른 팀의 경주차들로 인해 발생한 잇단 사고로 인해 더 이상 그룹 B를 누빌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설 자리를 잃은 푸조 205 T16 E2는 이후 다카르 랠리에 출전해 2회의 종합 우승을 따내고, 파이크스 피크 인터내셔널에도 참가하는 등, 활약을 이어가며, 오늘날에도 푸조 최고의 머신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차의 호몰로게이션용 양산차는 200마력의 최고출력을 내는 사양의 205 터보 T16으로, 205 GTI와 함께 푸조가 만들어 낸 최고의 걸작 핫해치로 손꼽힌다.

포드 RS200(1984)
포드는 예부터 WRC에 꾸준히 참가해 왔고, 지금도 현대차, 토요타자동차 등과 함께 여전히 랠리판에서 활동중인 터줏대감이다. 그리고 이들 역시 그룹 B에 출전하기 위한 랠리카를 만들었는데, 그 차가 바로 RS200이다. 이 차량의 설계는 유럽포드의 준중형 승용차 에스코트(Ford Escort)를 기반으로 하였으나, 엔진은 리어미드십으로 배치되어 있는 구조를 취했다. 여기에 카로체리아 기아(Ghia)에서 디자인한 전용의 외관 디자인을 입었는데, 에스코트 대비 현격히 넓어진 차폭과 더불어, 전용의 에어로 바디를 가져, 우수한 공기역학적 특성을 얻었다.

호몰로게이션용으로 제작된 일반 도로용 모델 역시, 금방이라도 랠리판에서 뛰쳐 나온 것만 같은 외모를 자랑하며, 단 200대만 생산되면서 RS200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영국의 엔진 명가 코즈워스(Cosworth)에서 개발한 1.8리터(1,803cc) 엔진을 탑재했다. 이 엔진은 보쉬(Bosch)의 모트로닉 엔진 매니지먼트 시스템과 가레트(Garrett) T3 터보차저를 적용했으며, 그룹 B 경주차 사양을 기준으로 450마력의 최고출력을 뿜어냈다.

하지만 이 엔진은 설계결함으로 인해 엔진 회전수 상승이 지연되는 현상이 일어나 조종이 매우 어려웠다. 이 때문에 1986년, 포르투갈에서 열린 랠리에서 사고가 발생해 관중 3명이 사망하고 많은 부상자를 냈으며, 동년 열린 독일 헤센 랠리에서는 나무에 충돌하는 사고를 일으켜 코드라이버가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사고를 일으켰다. 그룹 B가 폐지된 1987년 이후에는 서킷으로 무대를 옮겨 활약했다.

아우디 스포트 콰트로 S1 E2(1985)
1980년 이전까지 랠리판을 주름잡았던 경주차들 가운데, 사륜구동 자동차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1980년, 아우디가 야심차게 내놓은 상시사륜구동을 탑재한 아우디 콰트로가 등장하면서 랠리판의 판도가 급변하게 된다. 아우디 콰트로는 비록 무거운 중량과 더불어, 전후 중량배분의 밸런스가 나쁘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접지력이 극히 떨어지는 비포장 구간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사륜구동 시스템을 채용해 모든 WRC에 참가하고 있던 모든 레이스팀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1985년, 아우디는 콰트로의 약점을 통렬하게 파고 들었던 란치아 037에게 당한 굴욕을 갚아주고, 다시금 랠리판을 휘어잡기 위해 괴물을 꺼내드는데, 그 차가 바로 아우디 스포트 콰트로 S1 E2다. 이 차는 기존에 사용했던 메르세데스제 직렬5기통 터보 엔진의 출력을 크게 높여, 500마력을 초과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여기에 차량의 전후면에 거대한 윙과 스포일러를 설치해, 중량배분의 약점을 커버하는 한 편, 총중량 1,090kg에 불과한 몸무게로, 다시금 랠리판을 휘저었다.

그리고 이 차량을 위해 전용으로 만들어졌던 파워시프트 변속기는 이후 폭스바겐 DSG의 전신이 된다. 그리고 그룹 B 폐지 후 출전한 1987년 파이크스피크 힐클라임 레이스에서 우승을 거머쥐며, 그 발자취를 남겼다. 이 차는 호몰로게이션용 양산차로서는 상당히 많은 양이 생산되어 판매되었는데, 고작 200대 남짓인 여타 모델들과는 달리, 동형의 파생모델이 많았던 관계로 총 11,452대가 생산되었다.

란치아 델타 S4(1985)
란치아는 후륜구동 랠리 037으로 아우디 콰트로에게 패배를 안겨주었지만, 뒤 이어 벌어진 경기에서 푸조 205 등의 사륜구동 경쟁자들에 밀리면서 후륜구동의 명백한 한계와 더불어 사륜구동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란치아는 자사의 해치백 소형차인 델타(Delta)를 바탕으로 한 첫 사륜구동 경주차를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이 차가 바로 델타 S4다.

이 차는 1.8리터 가솔린 엔진에 터보차저와 수퍼차저를 함께 결합한, 트윈차저 엔진을 리어미드십으로 탑재하고 여기에 사륜구동까지 맞물려 랠리판을 또 한 번 휩쓸었다. 1986년 기준으로 최고출력이 무려 600마력에 달했는데, 이는 광기로 변질되었던 그룹 B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차는 광기로 물들어가던 그룹 B에 사형선고를 내리게 된다. 1986년 치러진 코르시카 랠리에서 절벽으로 추락하며 차량이 통째로 폭발하면서 드라이버와 코드라이버 전원이 사망한 끔찍한 사고를 낸 것이다. 이 일이 방아쇠가 되어 광기로 치달았던 그룹 B는 1987년 막을 내리게 된다.

란치아 델타 S4는 호몰로게이션 충족을 위해 일반 도로용 모델인 '스트라달레(Stradale)' 모델이 200대 만들어졌다. 스트라달레 모델은 250마력의 최고출력을 냈으며, 29.6kg.m의 최대토크를 냈고, 최고속도는 225km/h, 0-100km/h 가속 시간은 6초였다. 

페라리 288 GTO(1986)
1984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처음 등장한 페라리 288 GTO(Gran Turismo Omologato)는 페라리의 미드십 스포츠카, 308GTB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괴물들이 우글대는 그룹 B에서 제대로 경쟁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설계혁신이 필요했다. 따라서 본 바탕이 되는 308 GTB와는 상당한 부분을 재설계했다.

휠베이스를 늘리고, 차폭을 넓혔으며, 차체도 다소 길어졌으며, 지상고도 높아졌다. 비포장도로를 전속력으로 달려나가야만 하는 랠리의 주행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서스펜션은 전후륜에 모두 더블위시본을 썼다. 차체는 스틸 스페이스 프레임 섀시에 수지로 제작한 차체Body)를 얹어 완성했다. 엔진은 400마력/7,000rpm의 최고출력과 50.5kg.m/3,800rpm에 달하는 최대토크를 뿜어 내는 2.8리터의 V8 터보 엔진을 탑재했다. 여기에 공차중량은 1,160kg에 불과해, 0-100km/h 가속에는 4.9~5.0초밖에 걸리지 않았으며, 최고속도는 304km/h에 달했다. 페라리 로드카로서는 가장 파워풀한 성능임과 동시에 최초로 300km/h를 돌파한 차이기도 하다.

288GTO의 등장은 향후 페라리 F40, F50, 그리고 엔초 페라리와 오늘날의 라페라리까지 이어지는 페라리 최강의 미드십 스포츠카 계보가 시작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호몰로게이션을 위해 시장에 출시된 288GTO는 그룹B에 참가하기 위한 규정인 200대를 넘어서는, 272대의 판매고를 올리며 모든 준비를 마쳤으나, 동년에 그룹B가 폐지되면서 결국 그룹 B 출전은 무산되고 만다.

포르쉐 959(1987)
그룹 B가 한창이던 1983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등장한 ‘그룹B 스터디(Group B Study)’라는 이름의 컨셉트카를 통해 그 윤곽을 드러낸 이 차는 컨셉트카의 이름대로, 그룹 B 출전을 위한 호몰로게이션 모델로 만들어졌다. 차량의 설계 기반은 포르쉐 911을 바탕으로 했지만, 다판 클러치 구조의 중앙 차동기어, 전/후륜에 각각 구동력을 일정 수준 편향 배분할 수 있는 상시사륜구동 시스템 등, 혁신적인 기술들을 총동원했다.

엔진은 2.8리터 배기량의 수평대향 6기통 엔진으로, 시퀀셜 방식의 트윈터보차저를 탑재해 450마력에 달하는 최고출력을 냈으며, 실린더 블록은 공랭식, 실린더 헤드는 수랭식으로 구성했다. 이 외에도 센터 락 방식의 마그네슘 합금 휠, 양산차로서 세계 최초로 도입한 타이어 공기압 모니터링 장치(TPMS), 그리고 감쇠력 및 차고 조절식 전/후륜 더블 위시본 서스펜션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앞서간 기술들로 무장했다. 포르쉐 959는 0-100km/h 가속에 3.7초밖에 걸리지 않으며, 최고속도는 315km/h에 달하는 막강한 성능을 자랑했다.

그러나 이 차는 그룹 B에 끝내 출전하지 못했다. 1986년 그룹 B가 폐지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1987년 겨우 출시한 포르쉐 959는 단종될 때까지 단 337대만 생산되었다. 하지만 이후 포르쉐 959는 페라리 288 GTO가 그러하였듯, 이후 전개되는 포르쉐 슈퍼카/하이퍼카 라인업의 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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