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3연속 대박, 일본에서는 3연속 쪽박을 기록한 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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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3연속 대박, 일본에서는 3연속 쪽박을 기록한 차가 있다?
  • 박병하
  • 승인 2022.07.26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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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바다 건너 바로 마주하고 있는 일본의 자동차 시장은 성향이 크게 다르다. 대한민국의 자동차 시장에서는 전통적으로 브랜드를 가리지 않고 중/대형 차종의 선호도가 높은 반면, 일본 시장에서는 소형 차종의 선호도가 훨씬 높다. 이는 양국의 교통환경과 자동차에 대한 정책 기조가 서로 다른 것에서 기인한다.

반면 대한민국과 일본의 자동차 산업은 자동차 산업의 부흥기인 1960년대는 물론, 자동차 산업이 한창 성장기에 있었던 1990년대까지만 해도 서로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었다. 대한민국의 대표 자동차 기업인 현대자동차(이하 현대차)만 해도, 초기에는 미국 포드자동차(이하 포드)와 연을 맺었다가 1970년대 포니의 개발을 전후로 일본 미쓰비시자동차(이하 미쓰비시)와 밀접한 기술제휴 관계를 맺고, 이를 바탕으로 성장했다. 기아 또한 기아산업 시절부터 일본의 토요공업(現 마쓰다주식회사)과의 제휴를 바탕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지금의 한국지엠 또한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닛산자동차와 토요타자동차, 심지어 이스즈자동차까지 엮여 있는 등, 일본의 자동차산업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쌍용자동차 역시, 신진지프/거화/동아자동차 시절만 해도 이스즈자동차로부터 엔진을 공급받고 있었으며, 舊 삼성자동차(現 르노코리아자동차)도 초기에는 닛산자동차와의 제휴를 통해 세워졌다.

이러한 국내 자동차 산업과 일본과의 제휴관계 중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현대와 미쓰비시와의 관계일 것이다. 양사는 현대차가 포니를 개발할 무렵부터 엔진의 공급을 맡으며 기술제휴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이후에는 차량의 설계기반, 그 중에서도 당시 미쓰비시가 주력으로 밀고 있었던 전륜구동 구동계와 이를 바탕으로 한 전륜구동 플랫폼 등을 도입하며 당시 현대차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특정차종의 경우에는 현대차의 기술력 제고를 주시하던 미쓰비시가 아예 처음부터 현대차와 공동개발로 진행한 모델도 있었다. 양사의 공동개발 차종은 중저가형 승용차도, 상용차도 아닌, 양사의 간판 노릇을 하게 될 플래그십 고급 대형세단 모델이었다.

미쓰비시가 설계하고 현대차에서 만든다
1980년대 당시, 미쓰비시는 1964년부터 생산해오고 있었던 플래그십 세단, 데보네어(Debonair)의 노후화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물론 20여년의 세월 동안 상품성 보강 차원의 일부 변경사항은 있었지만, 기반설계는 물론 디자인조차 크게 변하지 않은 탓에 당시 일본에서 "달리는 실러캔스", "미쓰비시 중역 전용"이라고 비판받고 있었으며, 경쟁자인 닛산 세드릭(Nissan Cedric)이나 토요타 크라운(Toyota Crown)에게 압도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한편, 현대차는 플래그십으로 판매했던 그라나다를 더 이상 생산할 수 없게 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포니의 개발 이래 단계적으로 포드와의 제휴관계를 정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88 서울 올림픽을 앞둔 상황에서 포드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플래그십 대형세단 모델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에 미쓰비시는 급속한 성장세를 보이며 이미 자사에 비해 훨씬 대규모의 설비까지 갖추게 된 현대차의 역량에 주목했다. 그리고 현대차에 새로운 고급 승용차를 공동개발하는 프로젝트를 먼저 제안하게 된다. 프로젝트의 내용은 차량의 개발 및 설계는 미쓰비시가 주도하되, 차량의 생산은 현대차가 담당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이렇게 양사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 공동으로 개발하게 된 차는 일본에서는 2세대 '데보네어(Debonair)', 한국에서는 초대 '그랜저(Granduer)'로 불리는 고급 대형세단이었다.

그랜저는 대박, 데보네어는 쪽박
1986년 시장에 등장한 초대 현대 그랜저는 순식간에 시장의 이목을 잡아 끌었다. 이 당시의 중형~대형 세단 시장은 대우자동차의 '로얄' 시리즈가 완전히 틀어 쥐고 있었다. 하지만 그랜저는 등장과 동시에, 로얄 시리즈가 사실 상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던 대우 로얄 시리즈를 단숨에 밀어냈다. 그랜저가 등장하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대우 로얄 패밀리를 뒤흔들어버릴 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 국내 고급세단 시장의 입맛에 딱 맞아 떨어졌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 국내의 고급세단 시장은 극도로 보수적이고 과시적인 외관을 선호하고 있었던 데다, 전륜구동의 상대적으로 우수한 연비와 주행특성이 장점으로 작용했으며, 2.0리터 이하급 엔진만 존재해 성능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은 대우 로얄 패밀리에 비해 2.4리터 V6와 3.0리터 싸이클론 V6 엔진을 전면에 앞세워 성능 면에서도 압도했기 때문이다.

한편 마쓰비시는 20여년 만에 절치부심으로 2세대 데보네어를 내놓으며 시장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미쓰비시는 자사의 뛰어난 전륜구동 기술로 개발한 플래그십 세단이 경쟁사의 후륜구동 세단 대비 여러 이점을 가지고 있으며, 권위적인 외관 디자인을 통해 주요 타겟인 중장년층의 호응을 얻을 수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세대 데보네어는 일본 시장에서는 쪽박을 차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일본의 고급 대형 세단 시장은 후륜구동 자동차들이 주류인데, 전륜구동으로 만들어진 데보네어는 중량 배분의 불균형으로 인해 의전용 고급세단의 본질적인 가치로 여겨졌던 '승차감(특히 뒷좌석)' 부분에서 불리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당시 버블 경제의 절정을 맞이하고 있었던 일본에서는 젊고 스포티한 디자인이 각광을 받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렇기에 데보네어의 권위적인 스타일링은 고루한 것으로 여겨지며, 호응을 얻지 못했다. 미쓰비시는 독일 AMG와의 협업으로 특별사양을 출시하는 등, 어떻게든 성능을 어필해보려 애썼지만, "미쓰비시 중역 전용"이라는 타이틀은 결코 떼지 못했다.

또 다시 엇갈린 운명
위와 같이 양사의 공동개발 프로젝트가 한국에서는 대박을 치고, 일본에서는 쪽박을 차게 되었지만, 미쓰비시는 다시금 현대차와의 공동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된다. 그랜저의 성공을 지켜 본 미쓰비시는 이번에도 현대차에 생산을 맡기되, 디자인과 기본설계는 자사에서 진행하는 방식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차가 1992년 등장한 미쓰비시의 3세대 데보네어, 그리고 현대차의 '뉴 그랜저(2세대)'다. 

뉴 그랜저는 초대 그랜저의 성공에 '굳히기'를 가했다. 지나치게 직선적인 외관을 가졌던 초대 그랜저 대비 한층 곡선적인 디자인을 전면 적용한 뉴 그랜저는 당시 곡선적인 외관이 슬슬 트렌드로 부상하고 있었던 국내 시장에서 또 한 번 크게 어필했으며, 전체적인 사이즈도 훨씬 커져서 더욱 대형차다운 구색을 갖추게 되었다. 여기에 다양한 첨단 안전/편의사양을 아낌없이 투입해, 고급세단으로서 큰 경쟁력을 갖게 되어 국내 고급세단 시장을 완전히 틀어쥐었고, 그랜저라는 이름은 국내에서 고급세단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한편 미쓰비시는 3세대 데보네어를 디자인하며 보다 젊은 감각의 디자인을 적용하는 한 편,  초기형 라이다(Li-DAR)를 사용한 차간 거리 감지 기능 등의 각종 혁신적인 첨단 기능을 대거 선보이며 일본 내 대형세단 시장에 출시했다. 2세대 데보네어보다 더욱 철저하게 준비한 3세대 데보네어는 어땠을까? 안타깝게도, 데보네어는 또 다시 쓰디쓴 실패를 맛봐야만 했다. 1990년대 당시 일본은 버블경제가 무너지면서 전례가 없는 초장기 불황에 직면함에 따라 버블 시절 탄탄하게 유지되고 있었던 고급 승용차 시장 자체가 축소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욱 큰 몸집을 가진 경쟁차인 토요타 셀시오(Celsior, 렉서스 LS)와 닛산 시마(Cima, 舊 인피니티 Q45) 등에도 밀려, 또 한 번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절치부심으로 준비한 마지막 프로젝트, 그러나...
미쓰비시는 2, 3대 데보네어의 잇단 실패로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개념의 세단을 필요로 했다. 특히 닛산 시마, 토요타 셀시오 등의 대형화된 경쟁자에 대항할 만한 체급의 세단이 필요했다. 한편, 현대차는 그랜저의 2연타석 홈런에 성공했음에도, 그랜저보다 더욱 고급스러운 세단을 필요로 했다. 특히 1990년대 중후반의 대한민국 자동차 시장은 일본과는 달리, 고급세단 시장의 경쟁이 상당히 격화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1997년 등장한 기아 엔터프라이즈는 뉴 그랜저를 뛰어 넘는 크기와 강력한 마쓰다제 3.6리터 V6 엔진으로 엔진 배기량마저 넘어섰으며, 동년 하반기에 등장한 쌍용 체어맨은 무려 '벤츠 기술'을 등에 업고 혜성처럼 나타나 고급세단 시장을 빠르게 파고들었다. 다이너스티로는 우월한 스펙을 자랑하는 경쟁사 차종들에게 대항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경쟁자의 압박을 물리치고자 했던 현대차와 거듭된 실패를 만회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미쓰비시의 이해가 또 다시 맞아 떨어지며 새로운 고급 세단의 공동개발에 들어간다. 길이는 5미터 이상에, 배기량은 최대 4.5리터급 8기통 엔진을 탑재하는 '초대형 세단'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현대 에쿠스(EQUUS), 그리고 미쓰비시 프라우디아(Proudia)와 디그니티(Dignity, 국내명: 에쿠스 리무진)였다. 그리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해서 공동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함에 있어서 현대차의 입김이 상당히 강해졌다. 미쓰비시가 새롭게 개발한 V8 4.5리터 8A8형 엔진은 알루미늄 블록을 사용하는 엔진인데, 이 엔진의 생산을 전량 현대차가 맡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미쓰비시가 처음부터 알루미늄 실린더 블록을 사용하는 엔진으로 개발해 놓고도 정작 자사에는 알루미늄 블록을 생산할 설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현대차와 미쓰비시의 마지막 공동 프로젝트로 태어난 현대 에쿠스는 최초의 V8 엔진을 탑재한 국산 최고급 대형세단으로, 등장 당시부터 이전까지의 대형세단과는 격을 달리한다는 의미에서 '초대형 세단'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1999년 상반기에 국내 시장에 전격 데뷔했다. 에쿠스는 당대 국산 대형세단 가운데 가장 큰 크기와 미쓰비시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권위적인 외관 디자인, 그리고 정숙한 파워트레인과 부드러운 승차감으로 국내 대형세단 소비자 층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국내에서 차종을 불문하고 압도적인 선호도를 보이고 있었던 전륜구동계 채용과 넓은 실내, 화려한 내부 사양 역시 좋은 평가를 얻었다. 물론, 초기형의 미쓰비시 8A8형 엔진이 상당히 트러블을 일으켰던 관계로, 오메가 엔진으로 대대적인 보수를 단행해야 했지만 적극적인 성능개선을 통해 불만사항들을 잠재우며 그랜저에 이어, 다시금 국산 고급승용차의 대명사로 자리하게 된다.

그렇다면, 현대차만큼이나 절박한 상황에서 절치부심으로 준비했던 프라우디아는 어떻게 되었을까? 애석하게도 미쓰비시 프라우디아는 이번에도 일본 고급세단 시장에서 외면을 받고 말았다. 데보네어 시절부터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외관 디자인을 전혀 고치지 않았고, 일본 시장 내에서는 "F세그먼트 세단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인식이 강한 전륜구동 기반을 여전히 고수했기 때문이다. 또한 경쟁차에 비해 부족한 성능도 단점으로 지적되며, 일본 시장에서는 데보네어 시절부터 들어 왔던 '미쓰비시 중역 전용'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했다. 디그니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출시 초기인 2000년에 터지기 시작한 '미쓰비시 리콜 은폐 사건(三菱リコール隠し事件)'으로 인해, 미쓰비시는 기업의 신뢰도에 막대한 손상을 입게 된다. 이에 당시 최대 주주였던 다임러-크라이슬러(Daimler-Chrysler)가 자본 제휴를 끊어버리는 등, 심각한 경영 부진을 겪으며 파산 위기에까지 내몰렸다. 이 때문에 현대 에쿠스는 2009년까지 판매가 계속되었지만, 미쓰비시 프라우디아는 출시 단 2년 만인 2001년에 생산이 중단되고 만다.

그리고 2011년, 미쓰비시는 닛산과의 업무제휴를 통해, 닛산의 E세그먼트급 세단인 푸가(Fuga, 舊 인피니티 Q70)를 프라우디아로, 푸가의 롱휠베이스 버전인 시마(Cima, 舊 인피니티 Q70L)를 디그니티로 판매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물론, 이렇게 된 이유는 지역에 따라 특정 브랜드의 차량만을 구매하는 경향이 유독 강한 일본시장에 특성에 기인한 것이긴 하지만.

이렇게 같은 차를 두고도 명백히 다른 결과가 나와버린 세 대의 차들과 마찬가지로, 현대차와 미쓰비시는 상황이 서로 완전히 다른 처지가 되어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집단이자, 올 해 글로벌 4위에 올라 선 거대 자동차 기업으로 성장한 반면, 오랫동안 현대차의 스승이자 동업자 노릇을 했던 미쓰비시자동차는 2000년도부터 터지기 시작한 리콜 은폐 사건과 연비조작 사건 등, 잇단 사건사고로 인해 신뢰를 잃고 바닥까지 주저앉고 말았다. 현재 미쓰비시는 닛산의 대규모 출자를 통해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에 편입, 르노-닛산-미쓰비시 얼라이언스의 일원이 되었으며, 현재는 수출보다는 주로 내수시장에서 판매할 경차 및 소형 승용차, 소형 상용차량 등을 생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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