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자동차 역사의 시작을 알린 자동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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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자동차 역사의 시작을 알린 자동차들
  • 모토야
  • 승인 2022.05.11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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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의 역사가 시작된 구미권의 자동차 산업은 19세기 말엽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자동차 산업사는 두 세기를 넘나드는 세월 동안 차근차근 성장해 왔고, 산업으로서 뿐만 아니라, 하나의 역사이자 문화로 자리매김했다. 반면 대한민국의 자동차 산업은 이들에 비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성장 속도만큼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고, 지금은 세계 10대 자동차 생산국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현재 국내의 자동차 산업은 조선,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과 함께 대한민국 경제를 책임지는 제조업의 중추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자동차 역사는 대략 1950년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본다. 전쟁이 끝나고 황폐해진 대한민국은 그 어떤 나라보다도 자동차를 필요로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파괴된 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몇몇의 선구자들이 나타나, 대한민국에 자체적인 자동차 산업이 자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비록 그 수준은 부족했을 지 몰라도, 이들이 남긴 족적은 결코 가볍지 않다. 1950~60년대 초,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의 태동기를 이끌어 온 자동차들을 소개한다.

국제차량제작 시-발
1955년 10월, 광복 10주년을 기념해 열린 산업박람회에서 돌연 '우리 손으로 만든' 자동차가 등장해 이목을 끌었다. 바로 ‘국제차량제작(國際車輛製作)’이라는 소규모 자동차 제작사가 내놓은 차, ‘시-발’의 등장이었다. 국제차량제작의 시-발(始發)은 ‘첫 출발’, 혹은 ‘어떠한 일이 처음으로 시작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국제차량제작은 본래 광복 후 미군으로부터 불하(拂下)받은 군용 차량의 정비와 폐차 처리 등을 업으로 삼았던 ‘국제공업사’를 모체로 하는 기업이었다. 설립자인 최무성은 이 국제공업사를 얻은 경험을 통해 직접 자동차를 제작하는 사업을 시작했으며, 그 첫 결과물이 바로 시-발이다. 이들의 제작 방식은 현대적인 자동차 산업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한국전쟁 이래 미군이 불하하거나 남기고 간 군용 지프들의 부품을 수집하여 그 중 상태가 양호한 것을 골라 자동차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즉, 버려진 지프의 프레임 섀시와 엔진, 차축 바퀴 등 각종 부품을 떼어다 만드는 재생차량인 것이다. 물론, 차체(Body)만큼은 기존 지프와는 조금 다르게 보이도록 하면서도 새것과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해 드럼통을 가공하여 새롭게 제작했다.

국제차량제작의 시-발은 기술적으로는 조잡하기 이를 데 없는 '영운기' 수준이었다. 버려진 자동차의 부품을 재활용하는 것도 모자라, 외장 제작 역시 드럼통을 자르고 펴서 붙이는 원시적인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국내 자동차 산업 역사의 첫 페이지를 썼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1955년 8월에 처음 출시한 시-발은 동년 10월의 산업박람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고, 당초 예상과는 달리 상당한 숫자의 계약이 몰리는 등, 자동차를 필요로 했던 대한민국에서 소중한 이동수단이 되어 주었다.

신진공업 신성호
시-발 자동차는 최초의 국산자동차로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60년대 5.16 쿠데타로 제 3공화국 체제가 들어서면서 박정희 정부는 ‘국가재건 방안’ 중 하나로 내놓은 ‘자동차공업보호육성법’을 제정 및 공표했다. 그리고 이에 따라 등장한 기업이 ‘새나라자동차공업주식회사(이하 새나라자동차)’였다. 새나라자동차는 일본 닛산의 블루버드를 그대로 들여 온 모델에 가까웠기에, 품질이나 기술적 완성도 면에서 국제차량제작의 시-발 자동차와는 차원이 다를 수 밖에 없었고, 시-발자동차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 때, 1963년 부산에 위치한 '신진공업사'라는 정비개조공장에서 새로운 자동차를 출시해 주목을 끌었다. 이 차가 바로 '신성호'다. 신성호는 신진공업의 설립자 김창원氏가 새나라자동차를 보게 된 이래, '순수한 국산 세단'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완성한 국산 승용차였다.

신성호는 설계적인 기반은 군용 지프를 바탕으로 했다. 신진공업사의 본업은 미군에서 불하 받은 4/3톤 군용트럭을 개조하여 국내 최초로 규격화된 소형버스를 제작하던 회사였고, 그 덕분에 지프의 부품들도 조달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외관만큼은 당시 '양장미인'이라 불렸던 새나라자동차의 디자인과 매우 흡사하게 빚어냈다. 게다가 이 외장은 하나하나 두들겨서 만들어진 수제작품이었다. 여기에 차창과 타이어는 국산품만을 사용했다. 이 덕에 신진공업사는 윤치영 당시 서울시장의 도움으로 1964년, 신성호를 서울 시청 앞 광장에 전시, 많은 국민에 신성호의 존재를 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신성호는 상업적으로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근본적으로 시-발과 크게 다르지 않은, 군용 지프의 재생품에 가까워 품질이 조악한데다, 새나라자동차에 비해 가격조차 비쌌기 때문이다. 당시 신성호의 가격은 새나라자동차에 비해 2배에 달했는데, 이는 차체 하나하나가 모두 수공업에 의존하여 만들어진 탓에,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에 기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기술로 만들어진 두 번째 자동차인 신성호는 고작 318대 밖에 생산되지 못했다. 하지만 새나라자동차가 정부에 얽힌 비리가 터져나와 몰락의 길을 걸으면서, 신진공업사는 새나라자동차의 부평공장을 인수, '신진자동차'로 거듭나게 된다.

하동환자동차공업 하동환버스
지난 2018년 작고한 故 하동환 한원그룹 명예회장은 대한민국의 상용차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존재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954년, 24살 청년이었던 그는 전후 미군들이 버리고 간 지프 등의 차량을 직접 분해하고 재조립해가며 자동차의 원리를 알아가기 시작했고 이후 서울 마포구에 있었던 한 창고에서 ‘하동환자동차제작소’를 세웠다.

그는 자동차들 중에서도 여러 사람을 실어 나를 수 있는 ‘버스’를 주로 제작했다. 제작 방식은 미군들이 버리고 간 폐차들로부터 엔진과 변속기, 차대를 가져오고 차체는 드럼통을 펴서 만들었다. 제작 방식 자체는 후술할 국제차량제작 시-발 자동차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시 대한민국에서 그의 자동차는 무엇보다도 큰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전쟁 이후 공공 인프라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대한민국에서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었던 자동차 중 하나가 바로 ‘버스’였기 때문이다. 당시 하동환 사장은 ‘드럼통 버스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상당한 양의 버스를 생산했다. 

그리고 1962년, 하동환자동차제작소는 약 2,000평 규모에 달하는 구로동의 신 공장을 세우고 ‘하동환자동차공업주식회사(이하 하동환자동차)’로 사명을 바꾸고 본격적으로 대량생산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하동환자동차의 공장은 당시로서는 최신식 설비를 갖추고 있었고 하루 평균 2대의 버스를 생산할 수 있었다. 하동환자동차의 버스 공장은 쉴틈 없이 돌아갔다. 1960년대 당시 서울 시내를 돌아 다니던 버스 중 7할이 하동환자동차에서 생산된 버스였을 정도였다. 

그리고 1966년, 하동환자동차의 버스는 국산차 중 최초로 해외 수출길에도 올랐다. 그리고 하동환자동차는 1967년, 상공부의 자동차산업 계열화 정책에 의해 신진자동차의 계열사로 편입되었다가 동아자동차, 거화 등을 거쳐 오늘날 쌍용자동차의 전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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