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시리즈의 주인공 제임스 본드의 '본드카'로 유명한 애스턴마틴(Aston Martin)은 1913년 영국에서 세워진 최고급 스포츠카 제조사로, 내년이면 창립 110년을 맞는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사업 초기에는 자동차를 튜닝하는 튜너로서 시작했지만 1915년도부터 완성차 사업에 투신, 오늘날까지 그 이름을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애스턴마틴의 그 기나긴 역사는 순탄했던 적이 거의 없었다. 본격적으로 양산차 사업에 뛰어 들었을 당시, 유럽은 제 1차 세계대전의 화마에 휩싸이기 시작했고, 이를 기점으로 애스턴마틴은 사업 초창기부터 수 차례의 파산을 겪는 막장 상황으로 시작했다. 심지어 제 1차 세계대전이 종전을 맞고, 제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점까지, 애스턴마틴은 파산과 회생(혹은 재출범)을 반복했다.
하지만 이렇게 끈질긴 근성(?)에 하늘이 감복해서였을까? 1947년, 파산과 재가동을 근근히 반복하며 끈질기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애스턴마틴에 구원의 손길이 찾아왔다. 바로 데이비드 브라운(Sir David Brown, 1904~1993)이 등장한 것이다. 그는 1947년, 다 쓰러져 가던 애스턴마틴을 사들이고는, 중구난방이었던 라인업을 정리하고 생산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의 쇄신을 단행했다. 기업가 정신과 더불어 유능한 경영자인 데이비드 브라운을 만난 애스턴마틴은 그동안 무색했던 엠블럼의 날개를 활짝 펼치기 시작했다. 이 때 만들어졌던 애스턴마틴의 대표 GT 모델이 바로 DB시리즈다. 그리고 초기의 DB 시리즈를 바탕으로, 더욱 뛰어난 성능을 원하는 고객을 위한 고성능 트림에 해당하는 모델을 1950년대부터 내놓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애스턴마틴의 퓨어 스포츠카를 상징하는 이름인 밴티지(Vantage)다.
애스턴마틴의 순수 스포츠카, 밴티지의 역사는 1950년 GT 모델 DB2의 스포츠 버전으로 만들어졌던 'DB2 밴티지'로부터 시작한다. 차명인 밴티지(Vantage)는 영어로 ‘우세’, ‘이점’ 등을 의미한다. 애스턴마틴은 지금까지 10종에 달하는 밴티지를 만들어 왔다. 특히 1977년부터는 기존 DB 시리즈의 고성능 트림에서 본격적으로 독자모델로 완전히 독립, 반세기 동안 애스턴마틴의 퓨어 스포츠카를 담당해 왔다. 그리고 2022년, 애스턴마틴이 V12 밴티지 파이널 에디션을 공개하면서 탄생 72년, 독립 후 45년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애스턴마틴의 스포츠카 혼을 상징하는 이름, 밴티지의 역대 주요 모델들을 둘러보며 그 파란만장했던 72년사를 돌아본다.
DB2 밴티지(1950~1953) - 역사의 시작
DB2 밴티지는 1950년, 애스턴마틴 브랜드가 본격적으로 재출범하면서 등장한 GT 모델 'DB2'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첫 밴티지 모델이다. DB2 밴티지는 DB2에 비해 월등히 강력한 엔진을 탑재하여 주목받았다. 그리고 이 때부터 밴티지라는 이름은 '더 강력한 애스턴마틴'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DB2 밴티지에 탑재된 엔진은 일반형 DB2에 탑재되었던 2.6리터 라곤다(Lagonda) 엔진을 개조한 것이었다. DB2의 라곤다 엔진은 105마력의 최고출력을 내는 사양이었지만 애스턴마틴은 여기에 고성능의 SU HV6 카뷰레터(기화기)를 적용하여 8.16:1에 달하는 압축비를 실현했다. 이로써 125마력/5,000rpm에 달하는 최고출력을 달성했다. 이는 당시 르망 등, 모터스포츠 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던 애스턴마틴 경주차에 적용된 기술을 양산차로 끌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51년 영국 얼 코트 자동차 박람회(Earl’s Court Motor Exhibition)에서 애스턴마틴은 "두 대의 애스턴마틴 DB2 중 하나는 일반 엔진을 장착했고 다른 하나에는 르망에서 검증된 '밴티지' 엔진을 장착했다"고 홍보했다. 이는 영어로 ‘우세’, ‘이점’ 등을 의미하는 차명을 활용한 일종의 언어유희로, 밴티지 모델이 일반형 대비 더욱 강력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르망에서 검증을 마쳤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밴티지 엔진이 고회전 상태에서 안정적으로 회전수를 유지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애스턴마틴의 첫 밴티지인 DB2 밴티지는 약 250대가 생산되었다.
DB4 밴티지(1961~1976) - 애스턴마틴 엔진기술의 토대를 세우다
1961년 등장한 DB4 밴티지는 이전 DB2와 DB3 등과는 확연히 달라진 스타일링과 함께, 더욱 강력한 '스페셜 시리즈' 엔진으로 주목받았다.
DB4 밴티지의 '스페셜'한 엔진은 DB4에 사용된 알루미늄제 3.7리터 DOHC 직렬 6기통 엔진을 기반으로 제작되었는데, 여기에는 3기의 SU HD8 카뷰레터, 개선된 실린더 헤드와 직경이 확대된 밸브, 한층 높아진 압축비를 적용했다. 이로써 일반형 DB4의 240마력 대비 10% 이상 향상된 266마력의 최고출력을 냈다.
DB4 밴티지는 애스턴마틴이 '본드카'로 명성을 날리게 되는 첫 작품인 007 골드핑거에 출연하기 위해 만들어진 'DB5'의 기술적 모태가 된다. 영화 촬영을 위해 만들어진 'DB5'에 이 차의 엔진이 쓰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 당시 DB4의 후기형에 해당하는 DB4 밴티지 GT 모델들도 DB5와 유사한 외형을 가지고 있어, 몇 대가 영화 촬영에 사용되기도 했다. DB4 밴티지의 엔진은 향후 V8을 주력으로 사용하기 전까지 애스턴마틴 엔진 설계의 표준으로 자리 잡게 된다. DB4 밴티지는 쿠페와 컨버터블 GT 모델까지 포함하여 총 182대가 만들어졌다.
V8 밴티지(1977~1989) - 페라리 데이토나를 능가한 영국 최초의 슈퍼카
1977년 처음 등장한 애스턴마틴 V8 밴티지는 그동안의 애스턴마틴 스포츠카와는 크게 다른 설계사상과 퍼포먼스로 무장했다. V8 밴티지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기존의 직렬 6기통 엔진 대신 신형의 V형 8기통 엔진을 채용한 최초의 밴티지 모델이다.
V8 밴티지의 외관은 1970년대를 기점으로 크게 변화한 애스턴마틴의 스타일링을 잘 보여준다. 직선적인 스타일의 차체 형상과 더불어 중앙이 볼록하게 솟아 있는 보닛과 분리형 리어 스포일러 등이 특징이다. 그리고 디테일에서도 오늘날 애스턴마틴 디자인에서 나타나는 전통들이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최신 공기역학 설계를 도입하여 외관 상에서 나타나는 모습과는 달리, 상당한 다운포스를 만들어 낼 수 있어, 고속 주행에 유리했다.
하지만 V8 밴티지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그 성능에 있다. 이 당시 V8 밴티지는 영국을 대표하는 고성능 스포츠카로 통했다. V8 밴티지의 엔진은 라곤다 세단에 사용되었던 5.3리터의 배기량을 가진 V8 엔진으로, 4기의 웨버(Weber) 48IDF2/100 카뷰레터를 적용하여 390마력/5,800rpm의 최고출력과 56.0kg.m/4,500rpm에 달하는 최대토크를 발휘했다. 섀시 역시 고성능 쇽업소버와 더 낮은 스프링, 더욱 확대된 안티-롤 바를 적용하여 기존 애스턴마틴 양산차에 비해 월등히 높은 강성을 확보했다.
V8 밴티지는 페라리 데이토나를 능가하는 0-60mph(약 96km/h) 가속 성능과 170mph(약 273km/h)에 달하는 최고속도를 자랑했다. 그리고 이 막강한 성능으로 영국 매체에서 '영국 최초의 슈퍼카'로 소개될 정도였다. 그리고 1990년, 이탈리아 카로체리아 자가토(Zagato)와의 협업으로 만들어진 V8 밴티지 자가토를 끝으로 단종되었다.
DB7 V12 밴티지(1999~2004) - 애스턴마틴 최초의 V12
애스턴마틴 DB7 V12 밴티지는 애스턴마틴 최초의 V12 엔진을 적용한 양산차다. 비교적 최근까지 재규어의 수석 디자이너를 지낸 이안 칼럼(Ian Callum)이 맡았던 DB7의 수려한 외관 디자인과 더불어 강력한 성능과 V12 엔진의 감성설계 등으로 유명하다.
DB7 V12 밴티지는 일반형 DB7 대비 외관 상의 차이점은 크게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 퍼포먼스는 브랜드 내 최강을 자랑했다. DB7 V12 밴티지에 탑재된 엔진은 포드자동차의 3.0리터 듀라텍 엔진을 세로로 이어 붙여 V형 12기통 구조를 구현한 것이다.
이 엔진은 포드와 코즈워스(Cosworth)가 공동으로 설계한 RFF를 탑재하고 있으며 420마력에 달하는 최고출력을 자랑했다. DB7 V12 밴티지로부터 시작된 애스턴마틴의 5.9리터 V12 엔진은 이후 뱅퀴시, DB9, DBS, 비라지, 그리고 후술할 VH 아키텍처 기반 V12 밴티지 등, 다양한 고성능 모델에 20년이 넘게 사용되고 있다.
V8 밴티지(2005~2018) - 진화를 거듭한 현대적 애스턴마틴 스포츠카
77년 등장한 충격적인 성능의 V8 밴티지의 이름을 이어 받아 탄생한 VH 아키텍처 기반의 V8 밴티지는 역대 애스턴마틴 모델들 중에서 손꼽히는 장수모델이기도 하다. 특히 헨릭 피스커(Henrik Fisker)가 완성한 외관 디자인은 애스턴마틴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훌륭하게 재해석하여 새로운 밴티지가 등장한 지 2년이 지난 지금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시기의 애스턴 마틴의 밴티지는 탑재한 엔진에 따라 앞에 붙는 이름이 달라진다. 8기통 엔진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V8’, 12기통 엔진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V12’가 앞에 붙는다.
VH 아키텍처 기반의 V8 밴티지는 상대적으로 덩치가 큰 GT 모델들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던 밴티지 모델들과는 전혀 다르다. 체급이나 패키징 등 모든 면에서 포르쉐 911을 타겟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기존의 밴티지들과는 달리, 한층 컴팩트한 몸집과 가벼워진 몸무게를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 다른 애스턴마틴 모델들 대비 더욱 빠른 스로틀/스티어링/변속기 응답성을 갖춰 순수 스포츠카의 감각을 강조했다.
V8 밴티지의 심장은 재규어의 AJ-V8 엔진을 기반으로 대대적인 튜닝을 가한 결과물이다. 그리고 재규어가 슈퍼차저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던 데 반해, 자연흡기 방식을 끝까지 고수했다는 점도 특징이다. V8 밴티지의 엔진은 우수한 출력은 물론, 박력있는 사운드의 엔진을 가졌다. V8 밴티지에 탑재된 4.3리터 V8 엔진은 자연흡기 방식을 사용하는 고회전 지향의 엔진으로, 380마력/7,300rpm의 최고출력을, 후기형에 사용된 4.7리터 엔진은 420마력/7,000rpm의 최고출력을 가졌다.
밴티지(2018~2022) - AMG의 심장을 품은, 마지막 밴티지
햇수로 13년을 홀로 버텨왔던 밴티지는 2018년, 완전히 새로워진 모습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2018년 등장한 마지막 밴티지는 그동안 사용해 왔던 VH 아키텍처에서 벗어나, DB11 등의 신모델들이 사용하는 최신예 플랫폼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심장 역시, 재규어 AJ-V8 기반의 V8 엔진과 작별하고, 메르세데스-AMG의 4.0리터 V8 트윈터보 엔진을 사용하여 완성되었다. 또한, 새로운 밴티지는 더 이상 차명 앞에 V8이나 V12를 붙이지 않는다는 특징도 있다.
애스턴마틴의 마지막 밴티지는 당시 애스턴마틴의 최신 디자인 언어가 반영된, 한층 감각적이면서도 세련된 스타일링이 특징이다. 특히 기존 대비 한층 대담하고 공격적인 인상의 프론트마스크와 함께, 한층 늘씬하게 가다듬어진 차체형상, 그리고 애스턴마틴의 전통을 감각적으로 재해석한 디테일 등, 모든 면에서 밴티지의 한층 진화한 후계임을 알 수 있다. 플랫폼이 바뀌고 엔진도 교체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층 고등한 기술들이 적용돼 완성된 밴티지는 한층 가볍고 정교한 스포츠카로 재탄생했다.
애스턴마틴은 이 밴티지를 기반으로 다양한 파생모델을 제작한 바 있으며, 선대를 따라 각종 레이스에 참전하여 실력을 증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2022년, 밴티지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마지막 V12 밴티지가 등장하면서 애스턴마틴 밴티지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애스턴마틴 밴티지는 비록 그 역사에는 마침표를 찍었지만 앞으로도 애스턴마틴 퓨어 스포츠카의 혼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