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과거에는 고위층과 부유층의 상징이었고, 가까운 과거에는 성공한 중산층을 상징했던 현대자동차의 그랜저는 이제 '국민차'의 반열에 올랐다고 봐도 무방하다. 2010년대 후반 들어 그랜저의 판매량이 자타공인 국민차였던 쏘나타를 추월하기 시작하더니, 최근 몇 년간, 가장 많이 판매된 승용차종으로 우뚝 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1986년 첫 등장 이래 지금까지 국산 준대형~대형 세단 시장에서 부동의 1위 자리를 줄곧 지켜 온, 진정한 챔피언이라고 할 수 있다.
허나 그랜저는 등장 당시만 해도 챔피언이 아닌, '도전자'의 위치였다. 그랜저가 등장하기 전까지 당시 중형 이상의 세단 시장은 4기통 엔진을 앞세운 대우자동차의 로얄 시리즈가 꽉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랜저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현대자동차는 포드의 그라나다를 라이센스 생산하고 있었는데, 그라나다는 6기통 엔진을 사용했기에 의전차량으로서의 수요도 기대할 수 없었으며(1980년대 당시 상공부가 장관급 의전차량을 4기통 차량으로 제한), 결정적으로 가격도 비쌌고 차급에서도 경쟁할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현대자동차가 일본 미쓰비시자동차와의 공동개발로 완성한 초대 그랜저는 등장하자마자 대우 로얄 시리즈를 압도하다. 그리고 국내 대형세단 시장을 순식간에 평정하기 시작했다.
현대 그랜저의 등장에 가장 위기감을 느꼈던 제조사는 당연하게도, 로얄 시리즈로 시장을 틀어쥐고 있었던 대우자동차였다. 그랜저의 등장에 위기감을 느낀 대우자동차는 기존 로얄 시리즈의 고급화 가지치기 모델인 수퍼살롱을 출시하는 한 편, 오펠의 모트로닉 직렬 6기통 엔진을 탑재한 최고급 세단 임페리얼까지 출시하는 등, 그랜저의 시장 점유를 막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하지만 대우자동차의 세단 전성시대가 막을 내리는 것은 끝내 막을 수 없었다. 이번 기사에서는 국내 준대형 세단의 절대강자, 현대 그랜저에 맞선 차들 중, 대우자동차 계열의 모델들을 살펴본다.
대우 슈퍼살롱
대우자동차는 오펠 레코르트(Rekord)를 기반으로 한 여러가지 세단형 차종을 생산했다. 고급 버전인 로얄살롱과 중급 버전인 로얄프린스, 그리고 접근성을 높인 저가형 버전 로얄XQ로 이어지는 세단 3종 라인업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랜저가 등장하기 직전, 로얄살롱을 더욱 고급화한 '로얄살롱 슈퍼'를 추가하는 등, 로얄 패밀리를 완성했다. 하지만 그랜저의 등장으로 인해 모든 것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야심차게 내놓은 최고급 세단 로얄살롱 슈퍼는 그랜저의 등장으로 인해 순식간에 힘을 잃었다. 그랜저는 강력한 성능을 자랑했던 미쓰비시 시리우스 엔진의 '스펙'과 당시 소비자 층이 선호했던 극도로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디자인, 그리고 전륜구동의 이점으로 인해 로얄살롱 슈퍼를 모든 면에서 압도하며, 대우 로얄 패밀리의 꼭대기부터 찍어 눌렀다.
이에 대우자동차는 이미 경쟁력을 상실한 로얄 살롱 슈퍼를 단종시키는 한 편, 이듬해인 1987년에 로얄살롱 슈퍼를 대대적으로 개량한 '슈퍼살롱(Super Salon)'을 내놓았다. 대우 슈퍼살롱은 로얄 살롱 슈퍼의 전면부를 그랜저처럼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색채가 짙은 스타일로 변경한 것이 특징인데, 이는 당시 대우자동차 부평연구소에서 직접 디자인한 것이다. 여기에 오늘날 롤스로이스 등 최고급 세단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상하부 투톤 컬러도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반설계부터 근본적인 혁신이 없었던 슈퍼살롱은 그랜저를 끝내 이길 수 없었다.
대우 임페리얼
슈퍼살롱의 실패를 거울 삼은 대우자동차는 오일쇼크로 인해 백지화되었던 그들의 6기통 세단 프로젝트를 다시 꺼내들었다. 그리고 대대적인 수정 및 보완을 거쳐, 맹렬한 기세로 시장을 장악한 그랜저에게 카운터 펀치를 날리고자 했다. 대우자동차가 내놓을 새로운 대형세단은 (당대로서는)신개념의 디자인과 최신 편의사양, 그리고 오펠의 모트로닉 직렬 6기통 엔진을 한데 버무려 완성되었다. 이 차가 바로 1989년 등장한 대우자동차의 '임페리얼'이다.
대우 임페리얼은 그랜저를 굉장히 의식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프론트 마스크와 더불어, 당대 가장 긴 차체를 지녔다. 하지만 여기에 임페리얼만의 특징으로서 당대 미국의 고급세단에서 사용되었던 캠백(Camback) 스타일의 C필러를 적용한 것이 눈길을 끌었다. 여기에 당대 최강의 성능을 자랑했던 184마력의 3.0리터 직렬 6기통 모트로닉 엔진을 탑재했고, 항공기 실내의 이미지를 강조하면서 송아지 가죽으로 마감한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그리고 그랜저에게 밀리지 않는 다양한 편의장비를 갖췄다.
대우자동차가 혼신의 힘을 다해 완성한 임페리얼은 상기한 강점들과 더불어, 로얄 시리즈의 최신/최고급 세단이라는 점이 후광 효과로 작용하여 그랜저의 점유율을 조금씩 빼앗아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임페리얼의 앞길은 전혀 순탄치 못했다. 오펠의 3.0리터 모트로닉 직렬 6기통 엔진은 냉각 계통이 부실하여 주행 중 과열이 빈번하여 신뢰성이 떨어졌고 유럽산 엔진 특유의 소음도 당시 고급 승용차 소비층의 취향과는 맞지 않았다. 게다가 잔고장이 많고 품질도 좋지 못해 고급 승용차의 이미지를 스스로 갉아 먹었으며, 결정적으로 싸이클론 V6 엔진을 얹은 그랜저 3.0이 등장하며 몰락했다. 그리고 1993년 단종을 맞았다.
대우 아카디아
슈퍼살롱은 쓰러졌고 임페리얼마저 처절하게 몰락했다. 하지만 대우자동차는 그랜저에게 빼앗긴 고급 세단 시장을 포기할 수 없었다. 자신들이 일궈왔던 시장을 경쟁자에게 고스란히 빼앗겨버린 상황을 좌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우자동차는 1994년 새로운 고급세단을 내놓게 되었는데, 이 차가 바로 아카디아(Arcadia)다.
대우 아카디아는 대우자동차가 일본 혼다기연공업(이하 혼다)의 플래그십 세단, 레전드(Legend)를 라이센스 생산한 모델이다. 대우자동차가 라이센스한 혼다 레전드는 1990년도부터 생산하기 시작한 2세대 모델이었으니 당대 기준로도 나름 신형 모델이었던 셈이다.
아카디아는 그랜저에 비해 스타일링의 측면에서 훨씬 세련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당시 그랜저는 뉴 그랜저라는 이름으로 풀 체인지를 겪은 뒤였는데, 당시 국내 대형세단 소비층의 취향을 반영한,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디자인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카디아는 달랐다. 그랜저에 비해 장식적인 요소들을 절제하는 한 편, 전륜구동 세단임에도 낮게 깔린 차체와 후륜구동 세단에 가까운 차체 프로포션을 구현하여 스포티한 분위기를 냈다.
성능 또한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아카디아의 엔진은 혼다의 3.2리터 SOHC 엔진으로, 220마력/5,500rpm의 최고출력과 29.2kg.m/4,500rpm의 성능을 냈다. 이 뿐만 아니라 전륜구동이면서 엔진을 세로로, 심지어 프론트 미드십에 가깝게 배치함으로써 전후 중량 배분까지 신경 썼다. 여기에 한 체급 아래의 중형 세단과 비견될 정도인 1,580kg에 불과한 몸무게와 정교한 서스펜션 세팅 덕분에 주행성능만큼은 따라올 차가 없었다. 여기에 당대 최신의 안전/편의사양을 아낌없이 적용하여 상품성 측면에서도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아카디아는 그랜저의 벽을 넘지 못했다. 특히 당대의 국산 승용차 중 가장 비싼 가격표를 달고 있었던 점이 뼈아프게 작용했다. 아카디아의 출시 당시 가격은 4,075~4,330만원으로, 최고급 트림에 풀옵션을 적용하면 무려 4,440만원이라는, 국산차로서 당대 최고점을 찍었다. 당시 동사의 중형세단 프린스가 최고급 사양으로 구성해도 1,500만원 가량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거의 프린스 3대분에 달하는 것이었다.
아카디아에게 겹친 악재는 이 뿐만이 아니었다. 메르세데스-벤츠의 기술제휴를 등에 업은, 당시 고급세단 시장의 슈퍼스타였던 쌍용자동차의 체어맨이 등장한 것이다. 게다가 1997년 외환위기의 도래에 따라 국내의 수많은 대기업들이 구조조정을 하게 되는 과정에서 쌍용자동차가 대우그룹의 산하로 넘어오면서 체어맨을 손에 넣게 된다. 당대에 떠오르던 신성을 손에 넣게 된 대우자동차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아카디아를 조기에 단종시켜버리기에 이른다.
그리고 훗날 대우자동차가 GM의 산하로 넘어가 ‘지엠대우오토앤터크놀로지(이하 GM대우)’가 출범하고 쌍용자동차가 분리 독립하는 과정 속에서 대우자동차는 한동안 그랜저에 맞설 대형 세단이 사라지게 된다. 그런데 아카디아가 단종된 1998년을 기점으로, 그랜저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바로 '그랜저 XG'로 거듭나면서 대형에서 고급형 중형세단, 이른 바 '준대형'으로 포지셔닝이 바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