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상용차 연대기 – 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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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상용차 연대기 – 상편
  • bhp91 기자
  • 승인 2019.10.11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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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은 저마다 다르다. 하지만 원론적인 관점에서 자동차의 가장 본질적인 가치를 하나만 꼽는다면 아마도 ‘운송수단’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이 운송수단이라는 가치에 그 어떤 차종보다도 충실한 자동차는 바로 상용차(商用車, Commercial Vehicle)다. 상용차는 인원을 수송(버스)하거나, 화물을 운반(화물차)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 만들어지는 자동차들이다.

상용차는 우리나라의 자동차 역사에서도 승용차와 함께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한다. 대한민국의 상용차는 전쟁의 상흔을 떨쳐내고 발 빠른 산업화를 통해 일어서고자 했던 우리나라 경제 성장의 역사와 함께 해 왔으며, 오늘날에는 국내 여객수송은 8할 이상, 화물수송은 9할을 도로에 의존하는 우리나라의 물류 체계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상용차 시장은 그야말로 빈 손으로 시작했다. 초기에는 미군들이 남기고 간 지프 등을 개조 내지는 복제하여 쓰기 시작한 이래 이후에는 선진국의 자동차 회사로부터 기술 지원을 받아 화물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재는 국내 최대 자동차 기업인 현대자동차그룹을 중심으로 세계 시장을 겨냥한 형태의 상용차를 개발, 생산 중에 있다. 대한민국 자동차 역사의 초기부터 함께 해 온, 국산 상용차의 역사를 되짚어 본다.

국내 최초의 자동차는 ‘영업용’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자동차라고 할 수 있는 국제차량제작(國際車輛製作)의 시-발. 시-발은 본래 미군으로부터 불하(拂下)받거나 남기고 간 군용 지프들의 부품을 수집하여 그 중 상태가 양호한 것을 골라 짜맞추는 방식으로 생산된 자동차였다. 시-발은 자가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영업용’차량으로 만들어졌다. 약 2,200대가 생산된 시-발 자동차 중 500여대가 택시로 팔려 나갔다.

그리고 그 영업용 차량들 중에는 픽업트럭 형태의 차종도 존재했다고 알려져 있다. 엔진은 지프형 시발자동차의 것과 동일한 2.2리터 가솔린 엔진을 얹고 60km/h의 속도로 주행 가능했으며, 적재중량은 300kg 정도였다. 그러나 국내 자동차 역사상 최초의 화물차라고 할 수 있었던 이 차는 당시 국제차량제작의 열악한 생산 환경과 더불어, 밀려드는 택시 수요로 인해 생산에서 배제될 수 밖에 없었고, 당시만 해도 소형 화물차의 수요가 턱없이 적었다. 국제차량제작이 생산한 트럭형 시-발은 단 2대 뿐이다.

국제차량제작은 사명을 시발자동차로 바꾸고 새롭게 세단형 자동차를 내놓으면서 사세를 키워 왔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상용차 제작에도 손을 뻗었다.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던 버스 수요를 잡기 위해서였다. 시발자동차가 60년대 출시한 ‘시-발듸-젤뻐쓰’는 125마력의 디젤 엔진을 사용했다. 시발자동차의 디젤 버스는 공보부장관도 직접 시승하는 등, 상당한 주목을 받았으며, 이후에는 일본 이스즈(いすゞ, Isuzu)와의 기술제휴를 통해 대형버스와 화물차를 라이센스 생산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무리하게 자금을 투입하게 되었고, 이는 시발자동차 몰락의 단초가 된다. 그리고 1962년, 중앙정보부의 주도로 설립된 새나라자동차가 일본 닛산 블루버드 기반의 새나라자동차를 출시하면서 시발자동차는 결정타를 맞고 회사가 무너지고 말았다.

드럼통 버스왕, 하동환
지난 해 작고한 故 하동환 한원그룹 명예회장은 대한민국의 상용차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존재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954년, 24살 청년이었던 그는 전후 미군들이 버리고 간 지프 등의 차량을 직접 분해하고 재조립해가며 자동차의 원리를 알아가기 시작했고 이후 서울 마포구에 있었던 한 창고에서 ‘하동환자동차제작소’를 세웠다.

그는 자동차들 중에서도 여러 사람을 실어 나를 수 있는 ‘버스’를 주로 제작했다. 제작 방식은 미군들이 버리고 간 폐차들로부터 엔진과 변속기, 차대를 가져오고 차체는 드럼통을 펴서 만들었다. 제작 방식 자체는 후술할 국제차량제작 시-발 자동차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시 대한민국에서 그의 자동차는 무엇보다도 큰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전쟁 이후 공공 인프라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대한민국에서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었던 자동차 중 하나가 바로 ‘버스’였기 때문이다. 당시 하동환 사장은 ‘드럼통 버스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상당한 양의 버스를 생산했다.

그리고 1962년, 하동환자동차제작소는 약 2,000평 규모에 달하는 구로동의 신 공장을 세우고 ‘하동환자동차공업주식회사(이하 하동환자동차)’로 사명을 바꾸고 본격적으로 대량생산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하동환자동차의 공장은 당시로서는 최신식 설비를 갖추고 있었고 하루 평균 2대의 버스를 생산할 수 있었다. 하동환자동차의 버스 공장은 쉴틈 없이 돌아갔다. 1960년대 당시 서울 시내를 돌아 다니던 버스 중 7할이 하동환자동차에서 생산된 버스였을 정도였다.

그리고 1966년, 하동환자동차의 버스는 국산차 중 최초로 해외 수출길에도 올랐다. 동남아의 브루나이에 수출된 최초의 국산차는 HDH R-66 버스로, 당시만 해도 열악했던 국내 자동차 산업계에서 매우 뜻 깊은 사건이었다. 하동환자동차는 1967년, 상공부의 자동차산업 계열화 정책에 의해 신진자동차의 계열사로 편입되었다가 동아자동차, 거화 등을 거쳐 오늘날 쌍용자동차의 전신이 되었다.

하동환자동차는 픽업트럭도 생산한 바 있다. 1963년, 새나라자동차를 기반으로 제작한 ‘HDH 픽업트럭’이 바로 그것이다. HDH 픽업트럭은 새나라의 뒷부분을 잘라내어 그 위에 화물칸을 덧댄 형태로 생산되었다. 이 차는 일반적인 트럭의 리프스프링 대신, 승용차인 새나라의 코일스프링 서스펜션을 그대로 유지하여 우수한 승차감을 세일즈 포인트로 삼았다.

라이센스 생산의 시대
새나라자동차로 인해 자체적인 개발 역량 육성의 기회를 놓쳐버린 우리나라는 그 이후로 외국 기업의 자동차를 라이센스 생산하는 형태로 발전을 이루게 된다. 다만 라이센스 생산이 무조건적으로 나쁜 것만은 아니다. 경공업에 비해 부가가치가 높고 기술 획득이 어려운 중공업 분야에서 라이센스 생산은 산업을 일으키는 단계에 있었던 나라들이었다면 대체로 한 번씩은 거쳐 가는 과정이었다. 물론 라이센스 생산의 현실은 후발주자의 성장을 우려한 선발주자의 영향력 행사로 인해 후발주자 쪽에 불리하게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전쟁을 '쉰 지' 10년도 채 되지 않았던 당시의 대한민국에서는 산업의 중흥을 위해 찬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렇게 라이센스 생산을 통해 태어난 자동차들은 대한민국의 물류 운송을 책임지고, 소상공인의 발도 되어 주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기아산업(現 기아자동차)의 기아마스타 삼륜차였다. 일본 토요공업(東洋工業, 現 마쯔다주식회사)의 ‘K360’을 라이센스 생산한 기아마스타 삼륜차는 1963년부터 대한민국의 도로에 나타나기 시작한 기아마스타 삼륜차는 ‘최소의 경비로 최대의 효용!’이라는 문구를 내걸고 등장했다. 세 개의 바퀴에 아담한 크기의 객석과 적재함을 갖춘 이 작은 세 바퀴 트럭은 소량 수송이 필요한 곳곳에서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기아산업은 이 외에도 보다 큰 차체와 넉넉한 적재량을 갖춘 토요공업의 T1500도 함께 도입했다. 이 차량은 반조립 형태로 생산되었다. T1500은 K360 이상의 적재량을 요구했던 용달차 회사나 자영업자들에게 판매되었다. T1500은 1.5톤의 적재중량과 더불어 60마력의 1.5리터 수랭식 엔진 채용과 엔진 배치의 최적화로 정비성도 K360에 비해 월등했다. 이 차량은 1967년까지 생산되었다가 후속 차종인 T2000으로 대체되었다. T2000은 2.0리터급 엔진을 탑재하여 동력성능을 더욱 강화하는 한 편, 적재중량도 2톤까지 상승했다. 2톤에 달하는 적재중량과 유지관리 상의 이점, 기존에 비해 우수한 주행성 등에 힘입어, 장거리 운송에도 사용되었다.

한 편, 1965년도부터 새나라자동차의 부평 공장을 흡수하고 일본 토요타자동차와의 제휴를 통해 급속도로 성장한 ‘신진자동차공업(이하 신진자동차)’은 토요타의 코로나, 퍼블리카, 크라운 등의 토요타 승용차 뿐만 아니라 히노자동차(日野自動車, Hino Motors)의 대형 버스와 트럭 등 상용차도 생산하기 시작했다. 신진자동차가 제작했던 상용차 중에는 토요타의 유명한 오프로더인 랜드크루저의 픽업트럭 모델도 포함되어 있었다. 기아산업이 토요공업으로부터 화물차량을 생산할 때, 신진자동차는 히노자동차의 버스와 대형 트럭 모델을 생산하면서 하동환자동차 등과 국내 상용차 시장을 놓고 경쟁했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신진자동차에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토요타가 1970년을 전후하여 기존 승용차 라인의 부품 공급을 끊기 시작하더니 1974년, 돌연 일방적으로 철수를 선언하고 만다. 이는 저우언라이 당시 중국 총리가 한국 및 대만과 거래하는 기업의 중국 진출을 거부하는 외교적 협박이라 할 수 있는 ‘주4원칙’을 발표함에 따라, 중국 시장을 포기할 수 없었던 토요타가 일방적으로 청산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토요타와 히노의 라인업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던 신진자동차의 생명줄을 최종적으로 끊어버리게 되었다. 신진자동차가 몰락하게 된 이후, 신진자동차의 뒤를 쫓고 있었던 기아산업과 현대자동차가 더욱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국내 자동차 시장은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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