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도로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승용차들은 어떤 뼈대를 사용하고 있을까? 정답은 '모노코크(Monocoque)' 섀시다. 모노코크 섀시는 바디와 섀시가 일체형으로 구성된 섀시로, 일체형 차체구조, 유니바디(Unibody) 등으로도 불린다. 모노코크 섀시는 현재 승용차 시장에서 바디-온 프레임(Body-On-Frame) 섀시를 거의 몰아냈다. 주로 세단이나 쿠페, 해치백 등, 우리가 흔히 SUV나 미니밴, 픽업트럭 등과 구분짓는 의미의 '승용차'에 가장 널리 사용되는 섀시이며, 현재는 바디-온-프레임을 주로 사용했던 SUV들마저도 대부분이 모노코크 섀시로 돌아 섰다. 지금은 상용차와 일부 대형 혹은 오프로드 지향의 SUV, 픽업트럭 차량 등을 제외하면, 전세계 대부분의 승용차는 모노코크 섀시를 사용한다.
그렇다면 이 모노코크 섀시를 가장 먼저 상용화한 자동차 제조사는 어디일까? 그 답은 이탈리아의 자동차 제조사 '란치아(Lancia)'다. 란치아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꽤나 생소한 이름이지만 창립 이래 100년을 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서 깊은 제조사다. 유럽에서는 기술력으로 알아주는 자동차 제조사 중 하나였던 란치아는 피아트(FIAT)의 테스트 드라이버이자 기술자였던 빈센초 란치아(Vincenzo Lancia)가 설립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란치아는 랠리를 비롯한 각종 모터스포츠 무대에서 획득한 기술을 양산차에 그대로 투입하는 과단성과 우수한 성능으로 유명했다.
란치아가 세계 최초로 양산차에 도입한 기술들 중에는 우리가 일상적인 레벨에서 접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모노코크 섀시다. 세계 최초의 모노코크 섀시를 적용한 양산차는 란치아가 1922년에 선보인 람다(Lambda)다. 란치아는 이 외에도 오늘날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전기식 점화 장치와 전기식 전조등, 전륜 독립식 서스펜션 등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했다. 이 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로 5단 수동변속기와 V형 6기통 엔진을 양산차에 처음 도입한 제조사도 란치아다. 심지어 1980년대에는 페라리의 심장을 품은 최초의 세단, 란치아 테마 8.32(Thema 8.32)에 팝업식 리어스포일러를 적용하기도 했다. 또한, 란치아는 양산차에 최초로 V형 4기통 엔진을 적용한 제조사이기도 하다. V4엔진은 란치아가 창립 초기인 1920년대부터 애용해 왔던 레이아웃으로, 1970년대 초반까지 사용했다.
뛰어난 기술력을 품었던 이탈리아의 열혈 제조사 란치아는 다양한 모터스포츠 무대를 누볐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부문은 바로 '랠리'다. 란치아는 V4엔진을 적용한 소형 쿠페, 풀비아(Fulvia)를 통해 1970년대부터 랠리판을 휩쓸기 시작했다. 란치아는 풀비아 이후로도 스트라토스, 037, 델타까지 이어지는 WRC 무대를 휩쓸었다. 란치아 스트라토스는 통산 3회의 우승을 안겨주었고, 037은 '사륜구동'이라는, 당시 기준으로 거의 반칙에 가까운 기술로 무장한 아우디 콰트로와도 대등하게 경쟁했다. 그리고 037 이후에 등장한 델타는 당시 랠리판에서 최강자로 군림했다. 란치아의 WRC 매뉴팩처러즈 우승은 통산 10회에 이르며, 란치아가 랠리판을 떠난 지 수십년이 경과한 지금도 이 기록은 깨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란치아는 과거의 영광이 실로 무색한 처지에 놓여 있다. 란치아는 현재 피아트의 산하에 있으며, 소형승용차를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 내수용 브랜드로 전락한 상황이다. 현재 란치아의 유일하다시피한 양산차는 A세그먼트 소형차인 입실론(Ypsilon)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