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에 등장한 퀴뇨(Nicolas-Joseph Cugnot)의 첫 증기자동차는 말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대포를 옮길 수 있는 장비를 만드는 것에서 출발했다. 20세기에는 기술의 발달로 인해, 자동차는 전장에서 군마를 대체하기 위한 수단으로 각광받으며, 각종 지상 작전을 위한 기동 수단으로 끊임 없는 연구개발이 진행되었다. 자동차 공업의 발달은 전차(戰車)를 비롯한 다양한 기동장비들이 만들어지는 밑거름이 되었으며, `4륜구동`의 개념이 대대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도, 2차 대전 이후에 쏟아져 나온 미군용 지프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만큼 자동차와 군대는 자동차 역사의 여명기부터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자동차 산업의 역사에서 군대를 위해 태어난 자동차들이 큰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인 예로,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의 시발점이 된 국제차량제작의 `시-바ㄹ`을 들 수 있다. 미군이 폐기한 군용 지프들을 모아, 쓸만한 부품들을 떼어내어 하나의 완성차로 재조립하는 형태로 만들어진 시-바ㄹ은 대한민국 최초의 자체생산 자동차로 남아 있다.
이렇게 군대를 위해 태어난 자동차들은 전쟁 중에는 소중한 병력과 물자를 싣고 전선을 누비다가, 전쟁이 끝나게 되면, 민간에 불하(拂下)하거나, 이를 바탕으로 일부를 개조하여 민수용 자동차로 변신하기도 했다. 이 군 출신 자동차들은 일반적인 자동차에게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뛰어난 험로 주행 성능과 기동성, 신뢰성 등으로 인기를 끌기도 했다. 본 기사에서 다루게 될 차들은 전장을 위해 태어났다가 민수 시장으로 넘어오며 인기를 끌었던 `군 출신` 자동차들을 한 데 모았다.
지프 CJ (Jeep CJ)
지프는 브랜드 자체가 군용 차량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조상이 2차 대전에서 `미군의 발`로 서부전선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던 `윌리스 MB 지프`라고 말한다. 그리고 전후에 이 `지프`라는 단어가 당시 AMC(American Motor Corporation) 사의 등록 상표명이 되면서 오늘날 지프 브랜드가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기존 윌리스 MB 계열 지프를 가지고 민수용으로 개량하여 만든 차들이 지프 CJ였다.
지프 CJ는 전후 군용의 4륜구동 지프를 바탕으로 다양한 제조사에서 다양한 종류로 생산되었다. 차명의 CJ는 `Civilian Jeep`, 즉 `민간용 지프`를 의미했다. 초기에는 군용 차량에서 군용 장비(등화관제등, 보조 연료탱크 등)만 떼어낸 수준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농업을 보조하기 위한 유용한 수단으로 각광받으며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민간용 지프들 중, 1954년 만들어진 CJ-5는 훗날 대한민국의 신진지프자동차(現 쌍용자동차의 전신)가 최초로 국내 생산을 시작한 첫 군용 기동차량인 `K-100`, 그리고 `코란도(Korando)`의 기반이 된다.
쌍용자동차 코란도
`코란도`는 상기한 민수용의 지프, 지프 CJ-5 모델 중 카이저(Kaiser) 사의 모델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차명인 코란도는 잘 알려진 대로, ``한국인은 할 수 있다``를 영역한 ``KORean cAN DO``에서 가져왔다. 그리고 코란도는 신진지프자동차 이후로 거화, 동아, 그리고 쌍용으로 주인이 세 차례나 바뀌면서도 존속되었고, 오늘날에는 쌍용자동차의 SUV 브랜드로 남아, 국내 완성차 업계에서 가장 장수하고 있는 브랜드이기도 하다.
흔히 구코, 각코란도 등의 별명으로 불리는 초기의 코란도는 1969년부터 신진지프자동차의 인천 부평 공장에서 처음 생산을 시작했다. 이후, 장장 26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풀 모델 체인지 없이, 단일모델로 끊임 없는 개량을 거듭하며 판매되었다. 그리고 코란도를 통해 쌓은 SUV 제작 경험은 오늘날 SUV를 전공으로 하는 쌍용 자동차의 이미지와 기술적 기반을 닦는 토대가 되었다.
기아자동차(舊 아시아자동차공업) 록스타
舊 아시아자동차공업(이하, 아시아자동차)의 록스타는 당시 국군에서 사용 중이었던 K-111(1/4톤 트럭)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K-111은 포드와 AM 제너럴 등의 제조사에서 생산했던 M151A1을 국산화한 것으로, 외형 상으로는 보다 이전에 사용되었던 M38A1과 더 닮아 있다는 특징이 있다. 가벼운 중량과 저속토크가 우수한 직렬4기통 OHV 엔진을 사용하였으며, 우수한 험지 기동력을 국군에 제공해 온 K-111은 후술할 K-131의 전면적인 도입과 함께, 지금은 대부분의 차량이 퇴역했다.
이 K-111의 민간사업 계획은 1983년 10월에 열린 `한국기계지상전`에 아시아자동차가 출품했던 `랜드 마스터 짚` 컨셉트를 통해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로 인해, 출시가 지연되어, 1989년 하반기에 `록스타`라는 이름을 달고, 이듬해인 1990년에 겨우 출시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록스타는 기아차 최초의 SUV 모델이 된다.
랜드 마스터 짚 시절에는 군용 차량에서 사용했던 OHV 엔진을 그대로 장착하고 출시하려 하였으나, 록스타로 출시되는 과정에서 당시 기아산업(現 기아자동차)의 베스타에 사용된 2.2 로나 디젤엔진을 탑재하게 되었다. 지금의 지프 랭글러와 같은, 정통 오프로더를 표방하며 등장했으며, 쌍용 코란도에 비해 크기는 다소 작지만 밀리지 않는 4륜구동 성능을 뽐냈다.
기아자동차 레토나
록스타에 이어 등장한 기아자동차의 레토나는 K-111을 대체하기 위한 신형 기동차량인 K-131 1/4톤 트럭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흔히 `군토나`, 혹은 민수용 상표명인 `레토나`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렸던 K-131은 오늘날에도 국군 일선부대의 공무 관용차량이나 순찰차량, 작전용 기동 차량 등으로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최근 기아자동차가 1/4톤 트럭과 1과 1/4톤 트럭(일명, 닷지차)을 모두 대체하는 새로운 전술 기동 차량인 K-151 소형전술차량의 개발을 완료했고, K-151 및 새로이 도입할 실전 배치와 함께, 점진적으로 퇴역에 들어 갈 예정이다.
K-131의 민수용 모델이자, 군대에서도 통용되었던 명칭인 `레토나`는 록스타의 후속 모델로 등장했다. 레토나는 크게 전기형인 레토나와 페이스리프트를 거친 후기형 모델인 `레토나 크루저`로 나뉜다. 레토나는 K-131을 하드톱 구조로 변경하고 등화관제등의 삭제, 일반적인 형태의 범퍼 채용, 사이드 미러 변경, 알로이 휠을 적용하는 등, 군용차량의 느낌을 지워낸 형태로 완성되었다. 엔진은 2.0리터 디젤 엔진과 군용에 적용했던 2.0리터 가솔린 엔진을 사용하였다.
후기형인 레토나 크루저는 전면부의 스타일을 크게 바꾸고, 테일램프의 디자인도 통째로 바꿔, 레토나와는 한층 다른 분위기의 외양을 지녔다. 가솔린 엔진이 함께 출시되었었던 레토나와는 달리, 디젤 엔진 1종만 판매되었다. 레토나는 당시 국내 SUV들 중 가장 높은 등판능력을 자랑했고, 짧은 휠베이스와 높은 접근/이탈각을 지녀, 우수한 오프로드 주행 능력을 자랑했다.
메르세데스-벤츠 G클래스(Geländewagen, Wolf)
`차범근의 벤츠`로 화제가 되었던 메르세데스-벤츠의 G클래스는 現 독일연방군(Bundeswehr)의 군용 기동차량인 겔란데바겐(Geländewagen)에서 파생된 차로 유명하며, 겔란데바겐을 줄인 `G바겐`이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겔란데바겐은 험로주파를 목적으로 하는 SUV 형태의 차량을 일컫는 독일어로, 차가 가진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겔란데바겐은 고향인 독일이 아닌, 팔라비 왕조 치하의 이란 정부가 고기동성 군용차량 제작 의뢰를 받으면서 처음 만들어졌다. 이후, 군용 차량으로서 우수한 성능과 신뢰성을 인정받았으며, 현재에도 핀란드군과 미군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생산은 독일이 아닌, 오스트리아의 마그나 슈타이어 사가 전담하고 있다.
G클래스는 메르세데스-벤츠 SUV 기술의 `정수(精髓)`로 일컬어지며, 정통 오프로더의 기본 소양인 높은 접근각과 이탈각, 그리고 램프각을 기본으로 갖추고 있으며, 프레임-온-바디 형식의 차체를 지니고 있다. 여기에 메르세데스-벤츠 파워트레인의 넉넉한 동력성능과 전/후륜 구동력을 선택적으로 제어 가능한 3단계의 차동기어 잠금장치로 우수한 험로 주파 성능을 자랑한다.
람보르기니 LM (람보르기니 치타)
람보르기니 최초의 SUV라 할 수 있는 LM002는 본래 미군에 군용 기동차량으로 납품하기 위해 `치타`라는 코드명을 가지고 개발된 모델이었다. 군용으로 설계된 치타는 75mm 규격의 방탄 장갑판을 장비하고 상부에 GPMG(General Purpose Machine Gun, 다목적기관총) 등을 장착하여 전장을 누비는 야전용 기동차량으로 설계되었다.
하지만 람보르기니는 치타를 미군에 납품하겠다는 당초 계획을 이루지 못했다. 미군은 이미 치타를 뛰어넘는 성능의 고성능 기동 차량을 이미 손에 넣은 뒤였기 때문이다. 그 차가 바로, `험비`였다. 치타의 군용차량 납품을 실패한 람보르기니는 이 손실을 막을 요량으로, LM이라는 이름과 함께, 민수용으로 전용하여 1986년부터 생산을 개시했다.
치타 시절과는 달리, 실내를 가죽으로 뒤덮고, 최대한 많은 편의장비를 끼워 넣어, 럭셔리 SUV로서 판매했다. 하지만 이 당시에는 고급 SUV 시장이 지금처럼 크지 않았고, 결국 300여대에 불과한 생산 실적을 남기고 사라져갔다. 지금은 몇 남지 않은 차들이 뒤늦게 일부 매니아들과 중동의 부유층들에게 고가로 거래되고 있다고 한다.
AM제너럴 허머 H1 (HMMWV, Humvee, 험비)
AM제너럴 허머 H1은 `험비(High-Mobility Multipurpose Wheeled Vehicle, HMMWV, Humvee, 고기동성 다목적 차량)`의 민수용 모델이다. 허머 H1의 토대가 되는 험비는 80년대 이후부터 현대 미군의 발이자, 미 육군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된 AM제너럴의 걸작 군용 차량이다.
험비는 등장 당시는 물론, 오늘날에도 세계 최고수준의 험로 주파능력을 자랑하며, 세계 각지에서 미 육군의 든든한 발이 되어주었다. 2016년부터는 새로운 개념의 기동 차량인 `JLTV(Joint Light Tactical Vehicle, 통합 경량 전술 기동차량)`의 도입으로 인해, 30여년에 달하는 복무를 마치고, 일선에서 퇴역하기 시작했다.
허머 H1은 험비의 제작사인 AM제너럴이 수익성 확보를 위해 민간시장으로의 판로를 열기 위해, GM과의 협업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허머 H1은 `차도, 트럭도 아닌, 완전히 새로운 4륜구동차량`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1992년부터 판매를 시작했다. 군용 험비와의 차이점은 외장을 일반적인 자동차들이 사용하는 유광 도장의 적용, 방음재 추가, 가죽 등의 고급 내장재 사용, 오디오 시스템을 비롯한 승용차의 편의사양을 적용한 점 정도다. 성능에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는 차체 설계나 동력계통은 험비의 것과 같은 것을 사용했다. 이 덕분에 일반적으로 군용 차량을 민수용으로 전용(轉用)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사양의 변경과 그로 인한 성능 저하가 없었다. 이 덕분에 험비와 동일한, 당대 최고 수준의 험로 주파 능력을 자랑했다.
GM이 허머 브랜드를 인수한 이후에 만들어진 허머 H2와 H3는 브랜드의 기원이 된 허머 H1과는 근본부터 다른 차다. 허머 H1은 상술했듯이, 군용 차량인 험비를 민수용으로 전용한 차지만, H2와 H3는 쉐보레의 픽업트럭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당연히 동력계통도 픽업트럭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같은 것이라고는 브랜드 네임뿐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며, 허머 H1과는 성능 면에서 한참 뒤떨어지는 모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