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권에서는 예로부터 '레이스'를 좋아했다. 고대 로마 시절부터 전차(Chariot)를 가지고 레이스를 벌이는 트랙이 존재했으며, 경마, 경견, 심지어 비행기에 이르기까지, 달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레이스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자동차 역시 그들의 손을 피해갈 수 없었다. 자동차 산업이 일어남과 동시에, 유럽 각지에서는 크고작은 레이스가 열리기 시작했고, 오늘날 전세계에서 명차로 취급되는 차들은 대체로 이 레이스 무대에서 갈고 닦은 기술력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자동차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는 자동차 경주가 행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오픈콕핏, 오픈휠(휠이 외부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음) 온로드 레이스로서 정점에 있는 포뮬러 원(이하 F1)은 지금까지도 서구권을 중심으로 전세계에서 매년 400만명이 관전하고 15억명이 시청하는 메인스트림 스포츠로 통한다.
F1은 1984년 첫 그랑프리 경기가 열린 이래 오늘날까지 130년에 달하는 역사를 자랑한다. 그리고 이 기나긴 역사 속에서 많은 것들이 변화했다. 특히 경기를 치르는 드라이버와 팀 크루들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규제 역시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개정되어 왔다. 그리고 이렇게 추가된 안전규제의 상당수는 그로 인한 사고가 원인이 되어 정식 도입된 것들이기도 하다.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F1의 주요한 안전규제 변화상을 살펴본다.
2003년 - HANS
지난 기사에서 언급한 헤드레스트의 도입으로 인해 드라이버들의 목과 경추에 가해지는 부담이 조금은 경감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F1 경주차들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고, 그로 인해 충돌로 인한 부상 위험도 크게 늘었다. 여기에 2000년대 들어서 한층 고도화된 공기역학적 설계가 경주차에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드라이버의 목과 경추에 가해지는 부담은 더욱 늘었다. 이러한 가운데 2003년부터 도입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HANS(Head and Neck Support Device, 두부 및 경추 고정장치)다. HANS는 도입 초기에는 드라이버의 목을 붙잡아두는데다, 중량도 증가하므로 초기에는 불만도 있었지만, 이 장치는 충돌사고시 드라이버의 목에 가해지는 충격을 72%가량 저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에도 수많은 드라이버들의 생명을 구한 장비로 평가받고 있다.
2010년 - 재급유 금지
모든 레이스가 그렇지만, 특히나 F1은 '무게'를 줄이는 데 사활을 건다. 단 0.001초라도 더 빠르게 달리기 위해서다. 출력에 상한선이 있고, 중량에 하한선이 있는 모터스포츠에서 연료량을 유연하게 설정하면 경기를 더 전략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2010년 이후로, 포뮬러 1에서는 더 이상 피트스톱시 재급유가 불가능하게 규정으로 못박았다. 그 이유는 역시나 '안전' 문제였다. 그동안 F1에서는 급유 호스가 잘못되거나 급유 호스를 달고서 피트를 빠져나가는 등 여러 사고사례가 존재했기에, 사고의 원인이 될 만한 요소를 원천봉쇄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 재급유 절차를 금지시킴으로써 F1의피트 스톱 시간은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이 빨라졌고, 피트의 환경 또한 더욱 안전해졌다.
2014년 - 가속도계 도입
2014년 이후 F1 운전자의 이어피스에는 가속도계가 적용된다. 가속도계의 역할은 운전자에게 작용하는 힘에 대한 정확한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이다. 이는 충돌 사고 시에 특히 중요하다. 2014년에 도입된 신형 이어피스는 충격이 가해지는 동안 머리의 정확한 움직임과 함께 드라이버에게 가해지는 가속도 데이터를 기록해 향후 사고 예방을 위한 데이터로 활용된다고 한다.
2016년 콕핏 카메라
2016년도부터 F1 경주차에는 공식적으로 콕핏 내부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를 기록할 수 있는 카메라를 도입했다. 이 카메라는 무려 400fps의 프레임레이트로 드라이버를 촬영하며, 과거에는 퐃착할 수 없었던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장비의 도입은 역시 위와 마찬가지로 사고시 정확한 데이터 수집과 더불어 확실하게 원인을 규명할 증거자료로, 그리고 드라이버의 상태를 직접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게 해줌으로써 팀 크루로 하여금 위험요소를 즉시 인지할 수 있게 한다. 특히 드라이버를 붙잡고 있는 하네스와 HANS 장치의 정상작동 여부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이 가능하다. 이 카메라는 콕핏에 완전히 매립된 형태로 만들어져, 드라이버의 시야나 행동에 아무런 제약을 주지 않는다.
2018년 - 헤일로, 생체인식장갑
헤일로(Halo)는 지금은 위의 HANS와 함께 수많은 드라이버의 목숨을 구한 장비로 평가받고 있지만, 2018년 도입 당시까지만 해도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다. 오픈콕핏, 오픈휠 레이스인 F1에서 드라이버의 머리 부분을 직접 감싸고, 시야까지 방해하는 이 장비는 "F1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흉물"이라며 비난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장비는 300km/h 이상의 속도로 달리는 오픈 콕핏 레이스인 F1에서 헬멧과 함께 드라이버의 머리를 직접 보호해줄 수 있는 유이한 장비다. 이 장비가 도입된 배경으로는 2014년 일본 그랑프리에서 발생한 쥘 비앙키(Jules Bianchi)의 사고 사례에 있다. 이 사고는 드라이버의 머리를 직접적으로 보호해줄 수 있는 수단이 오직 헬멧 뿐이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고였다. 이에 FIA에서는 이 사고 이후부터 헤일로의 도입을 추진하기 시작했으며, 2018년도에는 아예 의무화로 못박았다.
또한 같은 해 도입된 생체 인식 장갑은 비록 헤일로에 비해서느 크게 조명되지 않았지만, 드라이버의 신체 상태를 직접 모니터링할 수 있는 혁신적인 장비다. 3mm 크기의 생체 인식 센서를 이용해 드라이버의 혈중 산소농도와 맥박 등의 바이탈 정보를 팀쪽으로 직접 전송하는 이 장비는 현장의 의료진에게 골든타임을 잡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