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자동차 대중화를 이끌다 - 유럽의 국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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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자동차 대중화를 이끌다 - 유럽의 국민차
  • 모토야
  • 승인 2024.01.18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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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자동차 보급은 미국에 비해서는 다소 늦은 편이다. 자동차의 시작점은 유럽이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자동차는 귀족과 유산계급을 위한 이동수단이었을 뿐, 서민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유럽에서 자동차가 본격적으로 대량보급되기 시작한 시점은 1950년대쯤부터다. 그리고 이 당시에 만들어진 자동차들은 유럽 자동차 역사에서 상징적인 존재로 여겨지며, 일부는 지금까지 대를 이어 만들어지고 있는 차들도 존재한다. 전쟁의 상흔을 딛고, 유럽의 발이 되어 주었던 유럽의 국민차들을 살펴본다.

프랑스 - 시트로엥 2CV
시트로엥 2CV는 경영난으로 미쉐린에 인수된 시트로엥이 제 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개발하고 있었던 자동차였다. 미쉐린의 경영진에 있었던 피에르-쥘 불랑제(Pierre-Jules Boulanger)는 시트로엥의 경영난을 해결하기 위해 신차 개발을 지휘했는데, 이 때 진행한 프로젝트가 TPV 프로젝트였다. TPV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도시의 부유층이 아닌, 프랑스 전역의 농민들에게 보급하기 위한, 값싸고, 간단하며 튼튼한 자동차를 목표로 개발되고 있었다. 이 차는 4개의 좌석에 50kg의 수하물을 적재할 수 있고,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트락시옹 아방(Traction Avant)의 앞엔진 앞바퀴굴림 방식을 적용했다.

하지만 TPV 프로젝트의 개발은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TPV의 개발이 마무리되어갈 때 즈음,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인해 각종 자재 가격이 크게 상승하면서, 목표로 했던 가격을 초과해버렸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시트로엥은 대대적인 수정에 들어갔는데, 하필 그 당시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해버리면서 개발이 더욱 어려워졌다. 나치독일이 자동차 공급을 위해 프랑스를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트로엥은 나치의 서슬 퍼런 눈을 피해 비밀리에 개발을 진행해 나갔으며, 전쟁이 끝난 1948년 드디어 출시하게 된다.

시트로엥 2CV는 극한의 원가절감으로 인해 특유의 외관으로 인해, 네덜란드 신문에서 "미운오리새끼"라는 조롱을 듣기는 했지만, 저렴한 가격과 간단한 구조가 선사하는 신뢰성, 다양한 활용도를 가져, 고향은 프랑스는 물론, 적국이었던 독일 등에도 수많은 양이 팔려나가며 1940년대 후반~1950년대 유럽의 국민차가 되었다. 튼튼하고 단순한 설계 덕분에 개조도 쉬워서 승용 버전은 물론, 다양한 상용 버전도 만들어져 다양한 현장에서 운송수단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독일 -폭스바겐 비틀
딱정벌레를 닮은 외형으로 유명한 비틀(Beetle)은 나치 독일의 국민차 보급 계획으로부터 출발했다. 국민차(Volkswagen)라는 이름의 시초격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차는 독일노동전선(DAF) 산하의 'KdF(카데프)'라는 조직이 주도하여 개발이 진행되었다. 개발은 페르디난트 포르쉐(Ferdinand Porsche)가 맡았는데, 차량의 설계는 독자적인 설계가 아닌, 체코 타트라(Tatra)사가 개발하고 있었던 소형 승용차 T97의 설계개념을 도용해 만들어졌다.

게다가 이 국민차 계획이라는 것은 독일 국민들에게 자동차를 보급하는 것은 명분에 불과했다. 나치독일이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국민들에게 인도되어야 할 국민차들을 전량 군용차량으로 전용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국민차를 인도받은 독일 구매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하여 훗달 세워진 폭스바겐은 전쟁이 끝난 이후, 국민차 구매자들을 대상으로 한 보상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한 편으로, 체코 타트라에게도 보상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폭스바겐 비틀은 독특한 외형과 저렴한 가격, 상대적으로 우수한 신뢰도를 통해 독일은 물론, 전세계에 팔려나갔다. 특히 미국에는 동사의 1세대 트랜스포터(Typ 2)와 더불어 히피족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고, 중남미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끌며 무려 40년 이상 생산이 이어지며, 단일 차종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 생산된 차로 기록되기도 했다.

이탈리아 - 피아트 누오바 500
이탈리아의 대표 자동차 기업 피아트(FIAT)의 창업주 '지오반니 아녤리(Giovanni Agnelli, 1866~1945)'는 "자동차는 결코 부자들의 전유물이거나 레이스만을 위한 존재가 되어선 안 된다"며, "대중을 위한, 저렴하면서도 우수한 성능을 내는 자동차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피아트는 오랫동안 탄탄한 설계를 가진 소형 승용차들을 만들어 왔다.

그러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경제의 부흥을 위한 마셜플랜의 가동,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로 공산품 수요의 폭증으로 이탈리아의 경제는 부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성장과 함께 자동차 수요도 크게 늘기 시작했다. 이에 피아트는 폭스바겐 비틀과 르노 4CV 등에서 채용한 후방엔진 후륜구동 방식에 주목하고, 이미 상용화된 요소들을 적절히 조합하는 방식으로 차량을 개발했는데,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차가 바로 600, 그리고 '누오바 500'이다.

1957년 등장한 피아트 누오바 500은 당시 이탈리아에서 구할 수 있는 자동차 가운데 가장 저렴한 자동차였으며, 단순한 구조와 매력적인 외관 디자인으로 이탈리아 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단순한 구조 덕분에 왜건형과 밴 형태의 차량도 만들어졌으며, 지속적으로 사양을 개선해가면서 상품성을 유지했다. 이탈리아의 국민차로 통했던 피아트 누오바 500은 1977년 단종을 맞았다.

영국 - 오스틴 미니/모리스 미니 마이너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자동차 산업은 독일에서 넘어 온 값싼 버블카들과 조잡한 구조의 삼륜차들의 인기가 크게 늘어나고 있었다. 1950년대를 강타한 수에즈 위기로 인해 영국의 석유제품 수급이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특히 영국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에 진 빚을 갚느라 당시까지도 부분적인 배급제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수에즈 위기로 인해 연료로 사용할 휘발유 공급량이 제한된 것이다.

이에 영국에서 가장 큰 자동차 기업집단이었던 램버리 남작 레너드 로드(Leonard Percy Lord, 1st Baron Lambury KBE, 1896~1967)는 독일에서 넘어 온 버블카들과 영국 내에서 만들어지는 3륜차들이 영국의 거리를 잠식하는 현상을 보며 "거리에서 이러한 자동차가 사라져야 한다"며, 자사의 히트작인 모리스 마이너(Morris Minor)를 디자인했던 그리스 출신의 설계자 알렉 이시고니스 경(Sir Alexander Arnold Constantine Issigonis, 1906~1988)를 불러들여 세기의 걸작으로 남은 소형차의 개발을 지시했는데, 이것이 바로 미니(Mini)다.

미니는 작은 크기를 가지면서도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개발되었다. 최대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앞엔진 앞바퀴굴림 방식을 적용하고, 독특한 구조의 서스펜션을 적용해 공간침해를 최소화했다. 이 덕분에 미니는 현재의 국산 경차보다 작은 크기임에도, 덩치 큰 앵글로색슨인 4명이 충분히 승차할 수 있는 차로 완성되었다. 저렴한 가격과 충실한 공간, 뛰어난 성능을 겸비한 미니는 영국을 상징하는  자동차로 등극하였으며, 지금도 BMW 산하에서 그 이름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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