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했던차]현대 코티나

기사입력 2018.10.01 16:11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내용 메일로 보내기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제조업에서 선발주자의 제품을 라이센스 생산하는 경험은 제품의 생산 및 개발에 대한 노하우를 획득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선발주자가 짧게는 십 수년, 길게는 수십년에 걸쳐서 얻은 성과를 빠르게 흡수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특히, 자동차와 같이 고도의 기술력이 수반되어야 하는 분야에서는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성장한 기업들이 많다.


01.jpg
 

물론 면허생산의 현실은 후발주자의 성장을 우려한 선발주자의 영향력 행사로 인해 후발주자 쪽에 불리하게 돌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산업의 중흥에 있어 찬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나라들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방식을 따르며 자체 산업 역량을 키워 나갔다. 이는 과거 전후의 상처를 딛고 산업화에 힘쓰고 있었던 대한민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한민국 자동차 역사는 광복과 한국전쟁 이후 미군이 남기고 간 군용 차량의 부속들을 주워 모아 만든 국제차량제작의 `시-발`을 시작으로 했다. 그 이후에는 자동차 산업의 선발주자인 서유럽이나 북미 등지의 자동차 기업들에서 이미 만들어진 차를 라이센스 생산하면서 발전을 이루며, 세계적인 규모로 성장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렇게 남의 차를 대신 만들던 회사 중 하나는 현재 대한민국의 자동차 산업을 주도하고 대한민국의 자동차 산업을 세계적인 반열로 오르게 한 거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바로 현대자동차다.


현대자동차는 자동차의 수리 및 정비사업을 위해 1947년에 세워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모태로, 1967년에 세워졌다. 현대자동차와 기술제휴 관계에 있었던 회사로는 일본의 미쓰비시자동차가 유명하지만, 현대자동차의 설립 초기에 손을 잡았던 기업은 포드였다. 따라서 현대자동차는 설립 초창기에는 포드의 양산차들을 라이센스 생산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대망의 첫 작품은 바로, 포드의 후륜구동 승용차, ‘코티나(Cortina)’였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자동차 기업, 현대자동차의 첫 양산차

현대자동차의 첫 양산차라 하면, 으레 ‘포니’를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현대자동차가 처음 만든 양산차는 포드로부터 라이센스를 받아 생산한 코티나였다. 포니는 현대자동차의 첫 독자 모델이라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현대자동차가 생산한 포드 코티나는 포드자동차의 유럽지부(이하 유럽 포드)에서 개발한 중형급 승용차다. 본 무대인 유럽 시장에서는 합리적인 가격과 우수한 공간설계 등으로 인기가 높은 차종이었다.. 현대자동차가 생산한 코티나는 1966년부터 유럽 포드에서 생산을 시작한 2세대 모델로, 특히 영국에서의 인기가 높았던 차종이었다. 생산은 CKD(Complete Knock down, 완전분해제품) 방식으로, 현대자동차 공장에서 모든 부품들이 조립되었다.


02.jpg
 

현대자동차의 첫 양산 승용차 코티나는 75마력의 성능을 내는 포드의 1.6리터 4기통 OHV(Overhead Valve) 엔진을 심장으로 삼았으며, 변속기는 4단 수동변속기였다. 변속 레버는 스티어링 컬럼에 설치되어 있는 형태였다. 승차 정원은 6명이었다. 여기에 정통 유럽식의 우아한 스타일까지 입은 코티나는 출시 이후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03.jpg
 

현대 코티나의 출시 당시 가격은 110만원이었다. 이는 경쟁 모델이자 선발주자이기도 한 신진 코로나에 비해 20만원이나 더 비싼 가격이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티나는 상당한 인기를 누리며 당시 중소형 승용차 시장을 틀어 쥐고 있었던 신진 코로나의 판매량을 상당 부분 빼앗아 오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 이유로는 경쟁 모델인 코로나에 비해 차체가 크고 실내 공간에도 여유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엔진 또한 신진 코로나에 비해 큰 배기량의 엔진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동력성능도 더 우수했다. 현대자동차는 코티나의 인기에 힘입어, 코티나의 생산이 본 궤도에 오른 1969년도에는 출시 1년 만에 5천여대를 생산했고 약 10억원의 판매고를 올리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세상 만사가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 현대자동차의 첫 양산차인 코티나는 이내 여러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현대자동차가 생산한 코티나는 1970년에 접어들어 품질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당시 현대 코티나를 구매했던 소비자들 중에는 택시 운전기사들이 상당 수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코티나의 품질에 심각한 불만을 표시했다. 급기야 소비자들이 자신들이 타던 차를 무더기로 반납하는 소동이 빚어졌다. 소비자들은 코티나의 서스펜션, 라디오, 히터 등 주요 부품들의 고장이 잦다는 것을 문제 삼았다. 또한 1969년의 홍수로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이 침수되는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을 이유로 ‘침수된 부품을 이용해 차를 만든 것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했다.


현대 코티나가 이러한 품질 문제에 직면하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코티나의 기본 설계가 국내의 교통 환경과 맞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원본인 포드 코티나는 당시 선진국의 잘 포장된 도로를 주행하는 것을 상정하고 설계된 차였다. 반면 1960년대 말 대한민국의 도로 사정은 상당히 좋지 못했다. 비포장 도로가 대부분에, 그나마 존재하는 포장도로 마저 아스팔트가 아닌, 콘크리트 혹은 시멘트 포장이 많았다. 매끈한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차가 견디기에는 혹독한 환경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큰 문제는 1969년의 홍수로 인해 침수된 부품이 양산차에 그대로 사용되었다는 것이었다. 기본 설계부터가 국내의 사정에 맞지 않는데 침수된 부품까지 사용했으니 품질이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잘못된 설계’와 ‘불량부품 사용’의 결과는 참혹했다. 현대 코티나는 당대 자동차 시장에서 ‘잔고장’의 대명사로 통했다. 대중은 현대 코티나에게 온갖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붙였다. ‘고치나’, ‘코피나’, ‘골치나’ 등, 차명과의 유사성을 이용한 말장난은 물론, ‘섰다 하면 코티나’, ‘코티나는 미는 차’ 등의 다소 노골적인 표현들도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다. 이 불명예스러운 이명들은 당시 코티나에 대한 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여기에 1970년 정부가 내놓은 여러 수요억제정책 등이 더해지자, 현대 코티나는 상품으로서 급속도로 힘을 잃었다. 승용차 시장이 축소되고 상품성 측면에서도 외면 받게 된 현대자동차의 첫 양산차 코티나는 생산 시작 후 3년이 채 되지 않은 1971년 9월에 단종되고 만다.


04.jpg
 

1971년, 현대자동차는 마크2 코티나의 단종과 함께 코티나의 3세대 모델(마크3)을 ‘뉴 코티나’라는 이름으로 출시했다. 뉴 코티나는 당시 최신 트렌드가 반영된 세련된 외관 디자인은 물론, 78마력 사양의 신형 OHC(Overhead Cam) 엔진을 탑재했다. 신형의 OHC 엔진은 기존 OHV 엔진보다 향상된 78마력의 성능을 냈다. 뉴 코티나는 엔진 성능 향상 외에도 차량 전반의 조종성능과 편의성 또한 개선되었다. 랙 앤 피니언 방식의 스티어링 시스템과 함께 2중 유압장치로 구성된 신규 브레이크 시스템을 채용했으며 변속기 레버는 기존의 컬럼식을 버리고 플로어 체인지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뉴 코티나는 국산화 비율이 약 41%로 늘어났다.


05.jpg
 

그 뿐만 아니라 마크2 코티나를 통해 품질의 중요성을 뼈가 시리도록 절감한 현대자동차는 ‘품질 관리’라는 개념에 비로소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현대자동차는 뉴 코티나의 생산에 앞서, 영국에서 3대의 샘플 차량을 미리 들여와 처음으로 ‘주행 테스트’라는 것을 실시했다. 여기에 차량의 설계와 관련된 실무자들을 영국으로 파견하여 지역의 특성을 반영한 보완 작업을 거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렇게 마크2 코티나보다 한층 주도면밀한 과정을 거쳐 내놓은 뉴 코티나는 기존 마크2 코티나에 비해 더 좋은 반응을 얻어낼 수 있었고, 마크2 코티나로부터 비롯된 불명예로부터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1971년, 현대자동차에게는 절호의 호재가 찾아왔다. 신진자동차의 제휴선이었던 일본 토요타자동차(이하 토요타)가 주요 모델들의 부품 공급을 돌연 끊어버린 것이다. 신진자동차는 이미 60년대 말부터 방만한 경영으로 인해 재정상황이 악화되고 있었고 토요타는 이전부터 아시아 최대의 시장이 될 중국 시장으로의 진출을 끊임없이 저울질하고 있었다. 그러다 1970년, 저우언라이(周恩來) 당시 중국 총리가 ‘한국 및 대만과 거래하는 기업의 중국 진출을 거부’하는 외교적 협박인 ‘주4원칙(周四原則)’을 발표했다.


06.jpg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도저히 놓칠 수 없었던 토요타는 1971년, 신진자동차가 라이센스 생산하고 있었던 각종 양산차의 부품 공급을 끊고, 1972년에는 끝내 신진자동차와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렸다. 토요타의 라인업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던 신진자동차의 생명줄을 최종적으로 끊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나마 있었던 경쟁차종이 사라진 코티나는 신진 코로나의 수요를 일부 흡수하는 반사 이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현대자동차는 뉴 코티나를 1976년까지 생산했으며, 1977년, 신세대 모델인 코티나 마크4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07.jpg
 

1977년 등장한 마크4 코티나는 콜라병 스타일의 선을 가진 마크3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인 직선적이고 점잖은 스타일의 외관을 갖췄다. 반면 플랫폼 등, 차량의 전반적인 구조와 관련한 설계는 마크3의 것을 대부분 계승한, 실질적으로는 대규모 페이스리프트 모델에 더 가까웠다. 마크4 코티나는 기본형인 세단형 모델 외에도 5도어 왜건형 모델이 등장하기도 했다. 마크4 코티나의 왜건형 모델은 당시 현대자동차가 생산했던 고급 승용차인 ‘포드 20M’의 왜건형 모델과 함께 소수가 구급차로 개조되어 사용되기도 했다. 마크4 코티나는 1979년, 개량형에 가까운 마크5 코티나에 자리를 물려주고 단종을 맞는다. 마크5 코티나는 포니에 이은 현대자동차의 두 번째 독자모델인 스텔라(Stella)의 밑바탕을 이루게 된다.

<저작권자ⓒ모토야 & motoya.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44472
 
 
 
 
 
  • (주)넥스틴ㅣ등록번호 : 서울-아02108 | 등록일자 : 2012년 5월 7일 | 제호 : 모토야(http://www.motoya.co.kr)
  • 발행인, 편집인 : 김재민 | 발행소 :  서울특별시 강남구 광평로280, 1215호 (수서동 로즈데일오피스텔)
  • 발행일자 : 2012년 5월 7일 | 대표번호 : 02-3452-7658ㅣ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재민    
  • Copyright © 2012 NEXTEEN. All right reserved.
모토야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