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의 플래그십... '그랜저'의 35년 - 하편
대한민국에서 자동차의 산업이 시작된 지도 벌써 반 세기가 훌쩍 넘었다. 한국전쟁 이후 조금씩 싹을 틔우기 시작했던 대한민국의 자동차 산업은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며, 오늘날에는 조선, 반도체, 전자제품 등과 함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주력 수출 상품 중 하나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도 할 수 있는 이 시간 동안, 대한민국에서는 수많은 자동차들이 태어나고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이름을 잇고 있는 차는 적어도 승용차 중에서는 의외로 얼마 되지 않는다. 제조사들이 신차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페이스리프트 모델에도 새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1986년 처음 등장한 현대자동차의 그랜저는 지금까지도 그 이름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혁대 현대자동차 양산차들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이름이기도 하다. 당시 새로운 플래그십 세단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던 일본 미쓰비시 자동차와의 공동개발로 처음 태어나게 된 그랜저는 초대 모델부터 2세대에 해당하는 뉴 그랜저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대한민국 대표 고급 세단으로서 명백하게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3세대에 해당하는 '그랜저 XG'부터는 다이너스티, 에쿠스 등, 더욱 대형화되고 고급화된 세단들의 등장으로 플래그십의 자리에서 내려와, '준대형'으로 그 포지션이 하향되었다. 그렇지만 오히려 당시 아직도 대중에는 그랜저라는 이름이 지워지지 않고 있었고, 현대차가 마르샤의 실패를 거울 삼아 작심하고 내놓아, 뛰어난 상품성을 가져, 역으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4세대에 해당하는 코드네임 'TG'부터는 준대형 세단 시장의 절대강자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4세대(TG, 2005~2011) 대한민국 대표 준대형세단으로 자리매김하다
2005년 서울모터쇼에서 첫 선을 보인 그랜저 TG는 기존의 그랜저와는 여러모로 차별화된 디자인을 시도하고, NF 쏘나타의 전륜구동 플랫폼을 기반으로 개발되어 편안한 승차감과 넉넉한 실내공간으로 눈길을 끌었다. 기존의 XG가 날렵하고 직선적인 스타일이었다면, TG는 부드러운 곡선으로 풍만한 볼륨감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과거 2세대 그랜저의 좌우가 하나로 연결된 형태의 테일램프를 살려서 전통을 잇는 한 편, 특유의 볼륨감 있는 리어 휀더 디자인을 처음으로 적용했다. 그리고 이러한 스타일링은 이후 출시된 HG와 IG에도 이어지게 된다.
그랜저 TG는 모델 체인지 주기가 5년 남짓으로 유독 짧았던 당대 현대차 모델들 가운데서도 상당히 오랜 7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생산되었다. 초기형 그랜저 TG는 2.4리터 세타 엔진을 탑재한 모델을 시작으로, 델타 엔진의 개량형인 2.7 뮤 V6 엔진과 3.3 람다 V6 엔진, 그리고 에쿠스에도 탑재되었던 3.8 람다 V6 엔진 등을 마련했으며, 영업용과 장애인용으로 2.7 뮤 V6 엔진 기반의 LPG 엔진 등, 다양한 엔진 라인업을 마련해 선택의 폭을 넓혔다.
그랜저 TG는 두 번에 걸친 페이스리프트가 이루어졌다. 첫 번째 페이스리프트는 2008년부터 생산되기 시작한 '그랜저 뉴 럭셔리'다. 이 때 생산된 그랜저에는 선택사양으로 하나의 모니터에서 운전석과 조수석 양쪽이 서로 다른 화면을 볼 수 있는 '듀얼 디스플레이 시스템'을 최초로 적용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파워트레인 라인업도 재정비하여 3.8리터 사양은 삭제했고, 이후에는 개량된 2.4 세타 II 엔진과 자동 6단 변속기도 새롭게 도입했다. 2009년에는 '더 럭셔리 그랜저'라는 이름으로 2차 페이스리프트를 진행했으며, 한층 고급화된 내장재와 더욱 화려해진 외관 디자인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2011년, 4세대 그랜저 TG는 후속 모델인 HG에게 바통을 넘기고 단종을 맞게 되었다.
5세대(HG, 2011~2016) 대한민국 대표 준대형에서 국민 준대형으로
코드네임 HG로 개발되어 2011년도에 정식 출시된 5세대 그랜저는 기존의 그랜저에 비해 대대적인 변화를 거치면서 시장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그랜저 HG는 기존의 TG에 비해 25mm 길고, 휠베이스는 무려 65mm를 늘려, 더욱 크고 당당한 풍채를 갖게 되었다. 이 뿐만 아니라 당시 현대차가 밀고 있었던 플루이딕 스컬프처 디자인 언어를 대대적으로 반영해, 한층 스포티하고 젊은 감각의 디자인으로 거듭났다.
파워트레인 라인업도 일신했다. 가솔린 엔진은 2.4리터 세타 II 엔진을 시작으로, 신개발 3.0 가솔린 엔진, 그리고 3.3 람다 V6 가솔린 엔진의 3종으로 정리했으며, 시리즈 최초로 2.2리터 디젤엔진을 도입했다. 또한 장애인용과 영업용으로 3.0 V6 엔진 기반의 LPI 엔진을 마련했다. 변속기는 자동 6단 변속기를 기본으로 적용했다.
5세대 그랜저에는 운전석 무릎 에어백이 포함 총 9개의 에어백, 타이어 공기압 경보 장치, 급제동 경보 시스템, 스마트 키 시스템 등, 다양한 안전/편의사양이 기본으로 적용되었다. 여기에 의전 수요를 감안해 뒷좌석의 편의장비도 크게 보강했다. 또한, 평행주차 보조 기능, 차간거리 조절 기능이 포함된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 등, 당대 국산 승용차로서는 높은 수준의 능동안전 기술을 선보이기도 했다. 2016년에는 그랜저 브랜드 탄생 30주년을 기념한 기념 모델도 발매하였다. 5세대 그랜저는 중형세단인 쏘나타의 시장까지 잠식해 들어갔다. 그리고 한층 젊어진 감각을 토대로, 보다 낮은 연령대의 소비자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으며 국내 판매량 Top 5에 입성하는 등, 고급 세단에서 '국민 대형차'로 자리매김했다.
6세대(IG, 2016~현재) 플래그십으로의 전환, 그리고 독주체제의 완성
2016년 11월, 현대자동차는 그랜저의 6세대 모델을 선보였다. 새롭게 태어난 그랜저는 기존의 젊은 감각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워진 플루이딕 스컬프처 디자인 언어를 적용한, 단단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로 거듭났으며, 기존 대비 한층 커진 차체로 더욱 당당해진 스타일을 자랑했다. 특히 다른 현대차 세단 모델들과 맥을 같이하면서도 그랜저만의 개성을 살린 신규 헤드램프, TG그랜저 이후로 줄곧 이어 내려오고 있는 고유의 캐릭터 라인, 그리고 HG그랜저의 것을 보다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리어 컴비네이션 램프 등의 디테일은 그랜저의 시그너처 스타일을 가장 현대적으로 완성 및 정립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파워트레인은 6세대 그랜저는 기존 5세대 그랜저에 적용되었던 유닛들을 개량한 것을 적용했다. 주력이 되는 개량형 2.4리터 쎄타 II 엔진과 개량한 3.0리터 람다 II V6 엔진을 주축으로 하였고, 기아 쏘렌토를 통해 성능을 검증한 2.2리터 R e-VGT 엔진을 적용했으며, 영업용/장애인용 차량을 위한 3.0 람다 LPI II 엔진의 총 4종으로 구성했다. 2018년도에는 그랜저 브랜드 최초의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을 적용해 큰 인기를 끌었으며, 2019년도에는 3.3 람다 엔진까지 추가해 무려 6종에 달하는 파워트레인 라인업을 갖게 되었다. 또한 2017년도에 현대 아슬란이 단종을 맞음에 따라, 그랜저는 근 20년 만에 다시금 플래그십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6세대 그랜저는 출시되자마자 승승장구를 이어갔다. 사전계약 첫 날부터 1만 5,973대가 몰리며 사전계약 신기록을 세운 것도 모자라서 몇 년간 국내 완성차 시장 베스트셀링 카 Top5에 내내 이름을 올렸다. 이렇게 그랜저의 인기가 고공행진을 하는 와중에, 현대자동차는 2019년 하반기, 그랜저의 페이스리프트 모델을 공개했다.
파격적인 변화를 맞은 페이스리프트 버전의 그랜저는 파라메트릭 주얼 컨셉트를 반영한 전면부 디자인과 더불어, 외관 곳곳을 미래지향적인 색채로 뒤덮었다. 또한 길이만 무려 5m에 육박하는 4,990mm에 달해, G80과 동일하며, 휠베이스 또한 40mm 연장해 한층 거대해졌다. 새롭게 달라진 외관 디자인은 출시 이전부터 논란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파격적이었고, 이로 인해 판매량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여전히 판매량은 고공행진을 이어가는 중이다. 파워트레인 라인업의 경우에는 신개발 스마트스트림 G 2.5 가솔린 엔진과 3.3리터 람다엔진, 그리고 영업용/장애인용 차량을 위한 3.0리터 람다 LPI 엔진, 그리고 2.4리터 엔진 기반의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의 총 4종으로 정리했다. 6세대 그랜저는 현재도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