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틀리 컨티넨탈 GT 오만 시승기

2012-04-22     김기범

2010년 11월 5일, 중동의 오만에서 벤틀리 컨티넨탈 GT를 시승했다. 눈매에 LED를 두르고 시트를 바꾸는 등 안팎을 꼼꼼히 손질했다. W12 6.0리터 엔진은 출력은 15마력, 토크는 8% 높였다. 변속기는 수퍼스포츠에서 가져왔다. 동시에 차체 무게는 65% 줄였다. 그 결과 반응이 보다 빨라졌고, 고속에서의 가속성능이 한층 힘차졌다.

입이 떡 벌어졌다. 시트마다 개인 미니바가 딸렸다. 미니바는 가림막이기도 해서, 주위의 시선을 든든히 가려준다. 시트는 평평히 눕힐 수 있다. 눈앞엔 큼직한 스크린이 걸렸다. 복도 끝엔 바텐더가 상주하는 진짜 바도 있다. 에어버스 A380의 비즈니스 클래스는 듣던 대로 호화판이었다. 3억 원에 가까운 벤틀리 타러가는 여정과 격이 어울리는 시작이었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경유지인 두바이 국제공항의 면세점에 전시된 경품은 눈부시게 흰 마이바흐 랜들렛이었다. 뒷좌석의 지붕부터 뒤 유리까지 시원스레 벗길 수 있는 초호화 오픈카다. 가격은 140만 달러로, 부가티 베이론 그랜드스포츠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비싼 차다. 솔직히 이날 실물을 보기 전까지 난 마이바흐 랜들렛이 컨셉트카인 줄로만 알았다.

가슴이 뿌듯했다. 여정의 목적지인 오만 공항에 내려서는 순간, 내 이름 적힌 팻말이 눈에 띄었다.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중동의 신사는 날 VIP 라운지로 데려갔고, 내가 시원한 음료를 홀짝이는 사이 입국 수속을 대신 마쳐줬다. 공항 밖으로 나서서 몇 발짝 걷자마자, 난 아우디 A8의 뒷좌석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상위 1%의 삶은 이런 거구나 싶었다.

지독히 낯설었다. 떠들썩한 분위기는 공항까지였다. 널찍한 도로 주변으로 삭막한 풍경이 펼쳐졌다. 나무 한 그루 없이 황량한 바위산이 삐죽삐죽 솟았다. 도로 주위로 야트막한 건물이 띄엄띄엄 서 있는데, 왠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여서 사람이 살긴 하는지 궁금했다. 초겨울인데다 오전 9시를 갓 넘겼을 뿐인데, 계기판에 표시된 온도는 섭씨 29도였다.

완전히 반대였다. 도심에서 멀수록 녹음이 우거지기 마련인데, 오만에서 푸른 잎은 도심에서만 볼 수 있었다. 건물의 밀도만 약간 높을 뿐 여전히 삭막한 다운타운을 거쳐, 아우디는 다시 모래바람 자욱한 오지로 접어들었다. 고갯마루를 넘는 순간, 동공이 파랗게 물들었다. 바다를 이웃한 호화 리조트가 한 눈에 들어왔다. 길고 낯선 여정의 종착지였다.

오만의 수도 무스카트에서 벤틀리의 신형 컨티넨탈 GT 시승회가 열렸다. 신드바드가 태어난 나라로 알려진 오만은 최근 유럽인들 사이에 휴양지로 인기가 높다. 화창한 날씨와 중동 특유의 이국적인 풍광 때문이다. 유럽에서 비행기로 5시간 정도 안팎이면 닿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오만의 해안가엔 최고급 리조트가 앞 다투어 들어서고 있다.

호화로운 여정과 벤틀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벤틀리의 전 차종이 장거리를 편안하게 이동하는데 초점을 맞춰 개발됐기 때문이다. 이런 성격의 차를 ‘그랜드 투어러(GT)’라고 부른다. 컨티넨탈이란 이름 뒤에 붙은 GT가 바로 그 뜻이다. 벤틀리가 신형 컨티넨탈 GT를 선보일 장소로 오만의 최고급 휴양지를 고른 이유가 능히 짐작됐다.

벤틀리는 1919년 월터 오웬 벤틀리가 영국에서 창업한 고급차 메이커다. 고성능 경주차와 주문 제작차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런데 1929년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자금줄이 묶였다. 벤틀리는 파산 위기를 맞았다. 결국 1931년 벤틀리는 롤스로이스에 인수된다. 이후 벤틀리는 롤스로이스의 스포츠 버전으로 명맥을 이어왔다.

1997년 벤틀리도 다시 한 번 운명의 갈림길에 섰다. 모기업 롤스로이스의 자동차 사업부문이 불황에 못 이겨 매물로 나온 까닭이다. 폭스바겐과 BMW가 벤틀리 인수전에서 맞붙었다. 롤스로이스에 12기통 엔진 기술을 전수했던 BMW에게 인수우선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폭스바겐과 BMW 모두 벤틀리를 노렸다. 호화롭되 스포티한 이미지를 높게 샀기 때문이다.

치열한 협상 끝에 폭스바겐이 벤틀리의 상표권과 롤스로이스 공장을 거머쥐었다. BMW는 무형의 자산인 롤스로이스 상표권만 헐값에 사들였다. 폭스바겐의 품에서 벤틀리는 제2의 전성기를 누린다. 한해 고작 몇 백대 찍어내던 롤스로이스 시절과 달리, 2007년엔 1만대의 벽마저 넘어섰다. 호화차 브랜드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손꼽혔다.

컨티넨탈 시리즈는 벤틀리가 폭스바겐의 품에 안긴 이후 내놓은 첫 모델이었다. 벤틀리 부활을 이끈 일등공신이기도 했다. 컨티넨탈 시리즈의 시작을 알린 건 2003년 선보인 컨티넨탈 GT였다. 이후 2005년엔 세단인 플라잉 스퍼, 2006년엔 컨버터블인 GTC로 가지를 뻗었다. 2007년엔 GT 스피드, 지난해엔 수퍼 스포츠까지 추가됐다.

컨티넨탈 시리즈의 외모는 제 각각이지만, 모두 같은 뼈대와 엔진, 사륜구동 시스템을 쓴다. 효율을 높여 소량생산의 단점을 상쇄시키기 위해서다. 컨티넨탈 시리즈의 인기비결은 모기업 폭스바겐의 기술력과 벤틀리의 수작업 공정이 황금비율로 어우러진 데서 찾을 수 있다. 기존의 초고급차보다 한층 현실적인(?) 가격도 인기를 부채질했다.

 
야자수 우거진 리조트 앞마당에서 신형 컨티넨탈 GT와 첫 인사를 나눴다. 화장만 살짝 고친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바뀐 부분이 많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눈매다. 반짝이는 LED 주간주행등을 네눈박이 테두리에 보석처럼 둘렀다. 부드럽게 눕혔던 그릴은 슬며시 곧추세웠다. 범퍼 디자인도 손질했다.

보닛의 좌우 끝자락과 앞바퀴의 펜더가 만나는 라인은 날카롭게 접었다. 벤틀리가 ‘앞날개’라며 자랑해마지 않는 부위다. 용접 없이, 한 판의 알루미늄을 500℃로 가열한 뒤 쾅 찍어 만들었다. 이른바 ‘수퍼포밍’ 기술이다. 테일램프는 보다 넓적해지면서 꽁무니의 모서리를 파고들었다. LED로 수놓은 테일램프 속의 타원 또한 얼씨구나 좌우로 늘어졌다.

기다랗고 두꺼운 도어를 당겨 열면, 호화찬란한 인테리어가 펼쳐진다. 특급호텔의 스위트룸 못지않다. 결이 고운 가죽과 자연산 레이저 가공 원목, 싸늘한 촉감의 알루미늄 패널이 어우러졌다. 넉넉한 크기의 시트는 벗겨서 입고 싶을 만큼 고급스럽다. 좌우로 코브라의 목덜미처럼 날개를 펼쳤고, 등받이와 엉덩이 받침엔 다이아몬드 꼴로 이중 스티치를 박았다.

 
시트엔 열선과 통풍이 기본이다. 앞좌석은 10개의 압축 셀이 마사지도 해준다. 시트를 다시 디자인하면서, 뒷좌석 다리 공간도 46㎜ 늘었다. 센터페시아엔 터치스크린 방식 모니터를 심어 각종 기능을 조작하기 한결 쉬워졌다. 오디오는 영국의 네임(Naim)제로 최대 11개의 스피커를 어울릴 수 있다. 음악을 담기 위한 저장 공간만 15기가바이트나 마련했다.

엔진은 이전과 같은 W12 6.0L다. 그러나 최고출력은 15마력, 최대토크는 8% 치솟았다. 엔진 부품의 무게를 줄이고, 각 부위의 마찰을 낮춘 결과다. 변속기는 컨티넨탈 시리즈의 최고성능 버전인 수퍼스포츠에서 가져왔다. 프로그램을 손봐 기어 갈아타는 시간을 더욱 줄였다. 게다가 급가속 땐 두 단을 성큼 내려서는 기능도 담았다.

이전과의 성능 차이는 뚜렷이 와 닿았다. 반응이 빨라졌고, 고속에서 가속이 한층 힘차졌다. 어차피 남아도는 힘이긴 했다. 네 명을 나르기 위해 575마력을 불사르는 건 분명 난센스. 그러나 이런 차에서 과잉은 곧 미덕이다. 게다가 다루는 실력에 따라 흉기가 될 수도 있는 괴력은, 벤틀리란 여과막을 거치면서 넉넉하고 부드러운 힘으로 승화됐다.


그래서 컨티넨탈 GT의 575마력은 시뻘건 불기둥이 아닌, 망망대해처럼 다가온다. 네바퀴굴림 시스템이 접지력을 챙겨주니 불안할 짬도 없다. 이 때문에 컨티넨탈 GT를 운전하는 건 의외로 싱겁다. 뛰쳐나가고 가로지르고 멈춰서는 조작이 놀이처럼 쉽고 즐겁다. 안락한 실내에 파묻혀, 잔잔한 진동과 사운드를 느끼면서 쏘다닐 때의 뿌듯함은 중독성이 짙었다.

모진 채찍질을 날리면 컨티넨탈 GT는 돌연 매서워졌다. 드로틀을 열 때마다 W12 엔진은 2.5톤짜리 거구를 불 대포처럼 펑펑 쏘아 날렸다. 초침이 채 다섯 칸을 건너기 전에 시속 100㎞ 가속을 마쳤다. 어떤 속도 대에서도 쥐어짜는 느낌 없이 튀어나갔다. 하지만 차 무게는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래서 가슴을 짓누르는 가속 G가 가벼운 차의 곱절쯤 된다.

디자인이 바뀌고 파워트레인을 개선했지만, 벤틀리의 절대 가치인 편안함엔 변함이 없었다. 서스펜션을 가장 딱딱하게 설정한들, 요철의 존재만 오톨도톨 도드라질 뿐 허리 뻐근한 스포츠카가 되진 않았다. 반나절 동안 400㎞ 이상 몰았지만 전혀 피로를 느낄 수 없었던 건 벤틀리 특유의 풍요로운 파워와 긴장을 녹이는 편안함 때문이었다.

 
박스 인터뷰

벤틀리 컨티넨탈 GT 개발 총책임자 - 켄 스캇(Ken Scott)

최근 몇 년 사이 벤틀리의 판매가 급격히 떨어졌다. 미국발 금융위기의 영향이었다. 지난해 판매는 2007년의 절반 수준인 5000여대.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며 생산규모를 늘렸던 벤틀리가 어떻게 위기에 대처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시승행사가 열린 오만의 샹그릴라 호텔에서 컨티넨탈 GT의 개발 총책임자 켄 스캇(Ken Scott)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1. 최근 벤틀리의 판매가 저조하다.
“2008~2009년은 벤틀리에게 아주 힘든 시기였다. 우리로서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벤틀리의 직원이 발 벗고 나섰다. 우선 나를 포함한 전 직원이 10%의 급여 삭감에 동의했다. 아울러 수당 없이 잔업에 나섰다. 동시에 정규직의 추가 고용은 최대한 억제하고 있다.”

2. 벤틀리가 가장 관심을 두는 시장은?
“벤틀리의 가장 큰 시장은 미국이다. 그 다음이 영국이다. 중국은 세 번째인데, 내년 제2의 시장으로 올라설 전망이다. 중국과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와 중동은 벤틀리에게 아주 중요한 시장이다. 최근 남미와 인도에 주목하는데, 우린 아직 거기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다.”

3. 불경기로 신차 개발이 연기되진 않았나?
“아니다. 오히려 더 철저히 지켰다. 신차만이 불황을 헤쳐 갈 방법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벤틀리의 최고급 세단인 뮬산이 데뷔했고, 이번엔 신형 컨티넨탈 GT를 선보이게 됐다. 이어서 컨버터블인 컨티넨탈 GTC와 세단인 플라잉스퍼 신형도 순차적으로 내놓을 계획이다.”

4. “벤틀리는 값비싼 폴크스바겐”이란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우리 같은 소규모 고급차 메이커에겐 자본력 튼실한 모기업의 존재가 절실하다. 원가절감에 연연하는 순간, 브랜드 이미지가 삽시간에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벤틀리는 폴크스바겐의 인프라와 기술을 적극 활용한다. 폴크스바겐을 벤틀리로 포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벤틀리를 더욱 벤틀리답게 만들기 위해서다. 차체만 독일의 폴크스바겐 공장에서 가져올 뿐, 모든 벤틀리는 영국의 크루 공장에서 수작업 방식으로 만든다. 접근방식부터 다른 차다.”

5. 폴크스바겐 그룹에서 벤틀리의 위상은?
“그룹 이미지를 격상시키는 존재로 인정받아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 지난해 공개된 뮬산이 좋은 예다. 폴크스바겐과 전혀 상관없는 뼈대와 엔진을 쓴다. 그만큼 비용이 많이 든다. 뮬산이 양산된다는 건, 폴크스바겐 그룹에게 벤틀리의 존재가 각별하다는 반증이다.”

6. 벤틀리는 친환경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우리도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상식 이상의 성능과 호화로운 외모 때문에 좀처럼 관심 받지 못할 뿐이다. 가령 모든 컨티넨탈 시리즈는 휘발유에 에탄올을 15% 섞은 E85를 연료로 쓸 수 있다. E85를 넣어도 성능과 정숙성, 내구성엔 전혀 차이가 없다. 아울러 내년엔 컨티넨탈 시리즈에 보다 친환경적인 8기통 4.0L 엔진을 얹을 계획이다. 폭스바겐 그룹이 새로 개발한 엔진인데, 벤틀리가 처음 얹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