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했던차]현대자동차 갤로퍼
80년대 말에서 90년대는 대한민국 자동차 업계에 있어서SUV 역사의 시발점이라 볼 수 있다. 이 시기부터 우리에게익숙한 왜건형 차체를 갖춘 SUV들이 속속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80년대의 쌍용 코란도(당시 거화/동아자동차)에도 다인승의 왜건형 차체가 존재하기는 했지만 현대적인 의미의 SUV라기보다는 군용 지프의 차체 연장형 파생 모델에 더 가까웠다.
이 시점을 전후하여 태어난 차들은 등장 당시에는 기존사륜구동 지프차의 변형 쯤으로 취급되었다. 하지만 몇몇 모델들이 잇단 성공을 거두면서 국내에도 조금씩SUV라는 개념이 정립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등장한SUV들은 지금은 각 제조사 SUV 라인업의 상징적 존재로통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현대자동차의 갤로퍼다.
현대자동차가 아닌, 현대정공에서 태어난 정몽구 회장의 첫 작품
갤로퍼는 현대자동차의 이름을 달고 태어난 첫 번째SUV다. 더불어 쌍용 코란도, 무쏘와 함께 국산 사륜구동 SUV의 대명사 중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이 차는 현대자동차가 직접 개발한 모델이 아니었다. 이 차의개발 주체는 당시 현대그룹 내에 있었던 ‘현대정공’이라는회사였다. 이 회사는 이후 여러 과정을 거쳐 오늘날 현대 모비스(Mobis)와현대 위아(WIA) 등의 전신이 되었다. 그리고 당시 이회사의 수장이 바로 지금의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인 정몽구 회장이다.
갤로퍼가 기획될1989년 당시의 대한민국 자동차 업계는 전두환 정권이 벌인 희대의 실책 중 하나인 ‘자동차공업합리화 조치’가 겨우 해제된 해였다. 이와 함께 당시 대한민국은저유가, 저금리, 저(달러)환율로 인한, 이른 바 ‘3저호황’을 누리고 있었던 시기였다. 경기가 호황을 이루던 이시기는 삶의 질 향상과 함께 대한민국의 레저 문화가 꽃을 피우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따라서 기존의 승용차외에 사륜구동계를 갖춘 다목적 차량에 대한 수요가 늘게 될 것으로 전망되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새로운 수요를 잡기 위해 현대자동차가 신모델을 직접 개발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정주영 회장이 현대자동차 대신, 장남인 정몽구 사장이 경영하던 현대정공에 신차 개발을 맡기게 된다. 이는당시 항공기, 철도차량, 공작기계 등 기계 전문 회사로 성장하고있었던 현대정공에 자동차까지 맡김으로써 종합 기계 제작사로 거듭나게 하여, 최종적으로 당시 정세영 회장이경영을 맡고 있었던 현대자동차를 정몽구 사장에게 승계시키기 위한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그동안 승용차 밖에 만들지 못했던 현대자동차의 경험 부족 등으로 인한 위험 부담도 무시할 수 없었다.
갤로퍼는 기획 당시에는 ‘M-CAR’로 명명한 현대정공의 독자개발 프로젝트로 시작하였다. 그러나기존에 현대자동차에서도 손대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차를 현대정공이 직접 개발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정공은 마북리에 연구소를 신설하고 현대자동차에서 생산하던 엔진과 부품들을 활용, 독자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우여곡절 끝에 첫 사륜구동 자동차의 시제품이완성되었고 이를 미국계 기업의 도움을 받아 성능 테스트를 거치게 된다.
하지만 결과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다. 사륜구동형 자동차는 당대의 일반적인 승용차에 비해 차체 구조강성, 사륜구동시스템 등, 승용차에 비해 여러가지로 감안해야 할 사항이 많았다. 그만큼설계가 복잡하고 까다로웠다. 또한 최대 수요지인 미국 시장의 요구에 맞지 않는 부분들도 많아, 수출에서도 좋은 성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개발 경험이 전무했던신생 업체에서 쉽사리 손을 댈 수 있을 만한 정도의 분야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에 정몽구 (당시)사장은 무리한 독자개발 대신 신뢰할 수 있는 제조사의 사륜구동 자동차를 라이센스 생산하는 것으로 프로젝트의 방향을바꿨다. 이에 현대정공은 당시 현대자동차가 기술제휴 관계에 있었던 일본 미쓰비시자동차에 동사의 1세대 파제로(Pajero)를 면허 생산하는 사업을 제안했다. 그리고 1990년도부터 기술 도입계약을 체결, 생산 설비의 신설하는 등의 준비기간을 거치게 된다.
그리고 1991년부터갤로퍼의 생산이 시작되었다. 차명인 갤로퍼(Galloper)는‘경주마가 전속력으로 질주하다’는 뜻을 가진 ‘Gallop’을 명사화한 것으로, ‘질주하는 말’을 의미했다. 현대자동차는 갤로퍼를 ‘다목적 승용차’로 소개하며 마이카 붐 및 레저 붐이 일고 있었던 국내시장으로 진입을 시작했다.
갤로퍼는 출시 초기에는 디젤 엔진을 탑재한 롱 바디사양만 출시되었다. 이후 11월에는 자동변속기 사양을, 12월에는 터보 디젤 엔진 사양을 순차적으로 투입하였다. 엔진은 73마력의 최고출력을 내는 미쓰비시 아스트론 계열의 4기통 2.5리터 디젤엔진을 사용하였으며, 이후 81마력의 터보 사양, 그리고 93년에는당대 디젤엔진 최고수준의 출력인 101마력을 내는 터보 인터쿨러 사양도 추가되었다. 좌석 배치는 초기에 5인승 스탠다드와 6인승 엑시드의 두 가지가 출시되었다.
1991년 9월에 하순에 정식 출시된 갤로퍼는 출시 직후부터높은 뜨거운 인기를 보였다. 갤로퍼는 10월부터 12월까지의 3개월간 무려 3천대가까이를 팔아 치우며 쌍용과 아시아자동차가 양분하고 있었던 SUV 시장에 무서운 기세로 비집고 들어오기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92년에는 무려 2만 4천여 대의 판매고를 올리면서 시장의 터줏대감이었던 쌍용 코란도및 코란도 훼미리, 그리고 아시아자동차의 록스타의 점유율을 뛰어 넘어버렸다. 이는 당시 국내 SUV 시장의 약52% 가량에 해당하는 엄청난 실적이었다.
갤로퍼의 인기 비결로는 이미 전세계에서 검증을 끝난SUV계의 성공작, 미쓰비시 파제로를 그대로 조립생산한 차였다는점이 크게 작용했다. 1세대 미쓰비시 파제로는 우수한 주행 성능과 뛰어난 신뢰도로 세계 시장에서 성공한차종이었으며,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만큼, 최소한의 품질을보장할 수 있었다. 이 당시 가장 직접적인 경쟁상대였던 쌍용 코란도 훼미리는 갤로퍼에 비해 성능과 품질양쪽 모두 부족하다는 평가가 많았다.
갤로퍼의 또 다른 인기 비결로는 현대자동차의 이름을교묘하게 활용한 데 있다. 갤로퍼는 분명 현대정공에서 만들어진 자동차임에도 불구하고, 판매는 현대자동차에서 담당했다. 또한 현대정공의 이름 대신 현대자동차의 ‘HYUNDAI’ 상표명을 그대로 사용했고, 후기형 페이스리프트 모델부터는아예 라디에이터 그릴에 현대자동차의 CI를 사용하기까지 했다. 하지만현대자동차의 이름을 등에 업은 이 전략은 제대로 먹혀 들어서 갤로퍼가 빠르게 시장에 안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1994년 등장한 후기형 ‘뉴 갤로퍼’는 사각형 헤드램프의 적용과 더불어 기존의 사이드 미러를 파제로와 같은 깃발형으로 변경했다. 갤로퍼 초기형 모델의 사이드 미러는 상용차와 비슷한 구조를 취하고 있었으나 이를 통해 보다 승용차에 더 가까워졌다. 또한 엔진과 차체 크기 등을 기준으로 한 세부 모델의 가짓수를 늘려 다양한 요구에 대응하고자 했다.
이 당시 뉴 갤로퍼의 하위모델 라인업은 무려 20여종에 달했다. 이들 중에는 2인승의밴 모델을 시작으로 구식 지프의 좌우 대향형 좌석 배치를 차용한 9인승 모델까지 등장했다. 그리고 엔진 라인업에서는 그랜저에 사용되었던 미쓰비시 사이클론 계열의 3.0리터V6 SOHC 엔진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갤로퍼는 같은 해 12월까지 누적생산대수 10만대를 돌파하게 된다.
하지만 꾸준히 잘 나갈 것만 같았던 갤로퍼에게도 위기가찾아왔었다. 터줏대감인 쌍용자동차가 ‘벤츠 기술’을 등에 업고 절치부심 끝에 완성해 낸 걸작, ‘무쏘(Musso)’의 출현 때문이었다. 1993년 처음 등장한 쌍용 무쏘는초기에는 부실한 파워트레인으로 인한 동력성능 부족 때문에 큰 인기를 얻지 못했으나, 2.9리터 OM602 모델의 도입과 함께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무서운 기세로 갤로퍼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두 차종은 2000년대 초반까지 경쟁하는 관계가 된다.
현대정공의 갤로퍼는 이후 1997년, 한 차례의 부분 변경을 거치게 된다. ‘갤로퍼 II’라는 이름으로 출시된 갤로퍼의 최후기형 모델은 기존갤로퍼와는 달리, 전후면부 및 차체 디자인 등에 대대적인 수정을 가했다. 직선적인 1세대 파제로의 차체에 곡선적인 감각을 대폭 부여하여 상당히다른 인상을 내는 데 성공했다. 디자인 변경은 롱바디 모델에 먼저 가해졌고, 숏바디 모델의 변경 모델은 1998년, ‘갤로퍼 II 이노베이션’이라는이름으로 출시되었다. 그리고 이 차들은 현대정공의 자동차 부문이 현대자동차에 통합 이관되는 2000년도까지 싼타모 등과 함께 현대정공의 손에서 계속 만들어지게 된다. 그리고 2003년, 갤로퍼는 12년여에달하는 역사를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오게 된다.
현대정공은 이미90년대 중후반부터 갤로퍼의 시장 경쟁력 약화를 우려하여 차기 모델을 준비하고 있었다. 코드네임 ‘HP’로 명명된 이 신차 개발 계획은 현대정공의 주도 하에 진행중이었고,SUV 형상 외에도 SUT(Sport Utility Truck) 형태도 고려되었다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90년대 후반은 외환위기로 인해 대한민국 경제가무너진 상황이었고, 현대그룹 내의 분위기도 좋지 않아, 프로젝트를순조롭게 이어가기 어려웠다. 갤로퍼의 섀시를 바탕으로 여러 부분을 독자적으로 개발하려 했던 이 프로젝트는훗날 갤로퍼보다 상위급의 SUV, ‘테라칸’으로 명맥을 잇게된다.
현대자동차 갤로퍼는 비록 출신과 원형은 현대자동차의독자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날 현대자동차SUV 라인업의 시금석을 놓았다는 점에서 반론의 여지가 없는특별했던 차다. 그리고 갤로퍼는 오늘날에도 추억의 자동차로 회자되는 대표적인 국산 SUV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근래에는 아예 구형 미쓰비시 파제로의부품 등을 구해 갤로퍼를 초기형에 가깝게 복원하거나 개조해 주는 경우도 생길 정도다. 또한 이 과정에서외관 상 구형 파제로에 더 가까운 초기형 모델들의 중고차 시세가 오르는 등의 일이 벌어지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