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쉐 911 GT3 컵 vs. 보잉 747 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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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쉐 911 GT3 컵 vs. 보잉 747 카고
  • 김기범
  • 승인 2012.04.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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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5일, 싱가포르 창이국제공항에서 포르쉐 911 GT3이 아시아·태평양 지역 최초로 공개됐다. 이번 911 GT3은 수평대향 6기통 3.8ℓ 435마력 엔진에 수동 6단 변속기를 물렸다. 또한, 역대 GT3 가운데 최초로 PSM과 PASM을 갖췄다. 911 GT3의 0→시속 100㎞ 가속 시간은 4.1초. 시속 160㎞까지 가속도 8.2초 만에 마친다. 최고속도는 시속 312㎞. 이날 활주로에선 부대행사로 911 GT3 컵 카와 보잉 747의 경주가 펼쳐졌다. 




별안간 초대형 전광판의 생중계 화면에 우리의 모습이 잡혔다. 크레인에 매달린 채 머리 위를 핑핑 휘젓던 카메라가 어느새 관중석을 겨냥하고 있었던 것. 시끌벅적하던 남녀 MC는 입을 꼭 다물었다. 우리의 지루함을 달래 주겠다며, 가냘픈 치어리더를 매몰차게 공중으로 내던지던 응원단도 잠자코 서서는 침만 꿀꺽꿀꺽 삼키고 있다. 돌연 정적이 찾아들었다. 

스피커에선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가뜩이나 아슴푸레한 아스팔트 지평선이 아지랑이 때문에 더욱 흐릿해 보인다. 그러나 오늘의 주인공 둘 가운데 하나를 알아보는 것 어렵지 않았다. 보잉 747 점보기니까. 그와 맞설 라이벌은 포르쉐 911 GT3 컵 경주차. 여기는 싱가포르 창이공항 제3 터미널의 활주로. 곧 747과 911 GT3이 세기의 대결을 시작할 참이다. 



윈-윈 전략으로 기획된 이벤트  

포르쉐 911 GT3 발표회 초청장을 보고 난 눈을 의심했다. 행사가 열리는 곳은 아담한 도시국가 싱가포르. 최고속도 시속 90㎞가 전부인 나라와 시속 300㎞를 넘게 달릴 수 있는 911 GT3과의 조합은 언뜻 이해가 되질 않았다. 찬찬히 내용을 읽어보곤 더욱 경악했다. 포르쉐와 비행기의 대결. 그 화끈한 스케일이라니. 싱가포르가 새삼 달라 보이기 시작한다. 

싱가포르에 내려선 건 행사 하루 전날인 9월 4일 늦은 저녁. 짐을 훌훌 벗어던진 우린 클럽이 밀집된 젊음의 거리, 클라크 키(Clarke Quay)로 향했다. 이국적인 정취와 금요일 밤의 열기로 가득한 그곳에서, 우린 ‘제육김치볶음’을 먹으면서 행사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싱가포르에 도착하기 전까지 우리는 그저 어리둥절했다. 머릿속은 새하얀 백짓장이었다. 

듣고 보니 이번 행사의 핵심은 포르쉐 911 GT3 발표회. 싱가포르 시장에 처음 선보이는 로컬 이벤트인 셈이다. 어쩌면 단순한 행사로 그칠 수 있었다. 그런데 싱가포르에서 롤스로이스와 포르쉐 등 여러 고급차 브랜드의 딜러 사업을 하는 사장이 판을 한껏 키웠다. 혼자서 북치고 장구 친 건 아니었다. 싱가포르의 관문, 창이국제공항과 함께였다. 무슨 얘길까. 

창이국제공항은 9월 27일 열리는 F1 싱가포르 그랑프리에 앞서, 공항 홍보에 도움이 될 이벤트를 구상 중이었다. 행사명은 창이 GP(그랑프리의 이니셜) 페스티벌. 그러나 마땅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던 차에, 싱가포르 포르쉐 딜러와 죽이 맞은 거다. 비행기와 포르쉐의 아이디어가 싹트는 순간이었다. 해외에서 종종 이런 대결이 있었으나 아시아에선 최초였다. 

아시아의 허브 공항을 꿈꾸는 창이 측에선, 이번 행사를 계기로 흥미진진하고 역동적인 곳이란 이미지를 알릴 희망에 부풀었다. 계획은 나날이 구체화됐다. 창이국제공항 측은 파격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제3 터미널을 내어준 것. 행사 당일만이 아니다. 한 달 전인 9월 내내 이번 대결과 관련된 게릴라성 이벤트를 진행할 수 있게 편의를 봐줬다. 

준비는 몇 개월 전부터 시작됐다. 포르쉐와 대결할 항공사는 싱가포르 에어라인 출신 기장 몇 명이 보잉 747 200-F 화물기 한 대를 공동구입해 창업한 항공수송회사 제트8로 낙점했다. 마침 제트8은 승객수송 사업에 진출할 계획을 세우던 참이어서, 홍보에 나설 필요가 있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단단히 맞물리면서 프로젝트엔 가속이 붙었다. 

원래 이번 행사는 싱가포르만을 위한 지엽적인 성격으로 기획됐다. 그럼에도 우리가 초청될 수 있었던 건, 싱가포르의 포르쉐 딜러 사장의 배포 때문이었다. 싱가포르에서 재력가로 손꼽힌다는 그가 행사 경비의 절반을 대겠다고 나건 것. 기왕 상 차리는 것 밥숟갈 몇 개 더 놓자는 계획으로, 대만과 한국 등 주변 몇 나라의 기자 16명을 불러들인 것이다.  




경주차와 양산차의 징검다리  

9월 5일 아침이 밝았다. 우린 창이공항 제3 터미널로 이동했다. 완전 축제 분위기였다. 웹사이트에 응모해 이번 행사의 관람권을 얻은 일반인과 포르쉐 아·태 지사 관계자, 이벤트 요원, 그리고 기자까지 북새통을 이뤘다. 권총과 자동소총으로 중무장한 공항경비대는 매서운 눈초리로 우리를 샅샅이 훑었다. 긴장과 기대가 앞 다투어 밀려들었다. 

프레스 패스를 받은 우린 비행기를 탈 때처럼 짐 검사를 마친 뒤 게이트 쪽으로 들어섰다. 시계를 흘끔거리며 하릴없이 탑승 시간까지 기다리던 공간은 새차 발표회장으로 말쑥하게 변신했다. 무대엔 911 GT3으로 추정되는 물체가 베일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행사의 시작은 새차 발표. 플래시가 작렬하는 가운데, 911 GT3이 섹시한 자태를 드러냈다. 

포르쉐 911 GT3은 자연흡기 엔진의 911 가운데 정점을 이루는 모델이다. 물론 흉포한 모델 득실거리는 911 라인업엔, GT3 위로도 몇 계단이 더 존재한다. 바로 위급으로, 한층 더 경주차에 가까운 911 GT3 RS가 있다. 그리고 터보 엔진과 AWD를 조합한 911 터보, 또 여기에서 AWD 시스템을 떼어내 최강의 성능을 뽐내는 911 GT2가 있다. 

그럼에도 911 GT3의 존재가 특별하게 다가오는 건, 경주차와 양산차의 징검다리이기 때문이다. 포르쉐 카레라 컵 레이스 경주차의 밑바탕이 바로 911 GT3. 따라서 레이스에서 얻은 노하우는 다음 세대 GT3의 개발에 빠짐없이 반영된다. 이번 911 GT3 역시 그런 선순환 과정을 거쳐 개발됐다. 최고의 R&D 센터인 서킷에서 실전으로 다져진 스포츠카인 셈이다. 

외모는 더욱 공격적으로 다듬었다. 흡기구를 키워 냉각효율을 높였고, 정교하게 설계된 립스포일러로 다운포스를 늘렸다. 엔진을 감싼 꽁무니엔 방열을 위한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GT3의 상징이기도 한, 커다란 리어 윙을 달았다. 윙의 지지대 옆면엔 3.8을 음각으로 새겨 넣었다. 여기엔 전설적인 1993년형 911 RS 3.8의 아련한 추억도 담겨 있다.   

신형 GT3의 엔진은 수평대향 6기통 3.8ℓ. 출력은 이전보다 20마력 치솟은 435마력. 리터 당 마력은 114.6마력(bhp). 전 회전영역에 걸쳐 토크도 살찌웠고, 최대엔진회전수는 8천400에서 8천500rpm으로 늘렸다. 변속기는 수동 6단. 기어비는 일반 카레라보다 22% 더 촘촘하다. 업시프트 시점에 경고등을 밝히는 기능도 담아 경주차 분위기를 한껏 살렸다. 

아울러 이번 GT3은 역대 최초로 포르쉐 스태빌리티 매니지먼트(PSM)와 서스펜션의 감쇠력을 조절하는 PASM을 갖췄다. PSM은 횡방향의 일탈을 감싸는 주행안정장치(SC), 헛바퀴를 막는 트랙션 컨트롤(TS)을 단계적으로 끌 수 있다. 911 GT3의 0→시속 100㎞ 가속 시간은 4.1초. 시속 160㎞까지 가속도 8.2초 만에 마친다. 최고속도는 시속 312㎞. 

새 911 GT3에서 가장 역점을 둔 점은 다운포스. 공기역학을 고려한 치밀한 설계에 힘입어, 고속에서 앞뒤 액슬을 누르는 힘이 이전의 두 배 가량 늘었다. 차체도 30㎜ 더 낮췄다. 차체 바닥은 언더커버로 감쌌다. 공기저항을 줄이기 위해서다. 한편, 살벌한 성능을 갖추고도 GT3은 유로5를 가뿐히 통과했다. 포르쉐가 우러러 보이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손에 땀 쥐게 한 박빙의 승부 

이제 게이트 바깥의 활주로로 나설 차례. 안전요원의 형광색 조끼를 의무적으로 입어야 했다. 밖으로 나서는 순간, 저절로 눈이 감긴다. 적도와 가까운 싱가포르의 위력적인 뙤약볕 때문이었다. 널찍한 활주로엔 항공기가 분주히 오갔다. 그 틈바구니에 관중석을 마련했다. 양쪽엔 대형 전광판이 걸렸고, TV 생방송이 시작됐다.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보잉 747의 파일럿은 64세의 피터 레오 친 팡 씨. 29세 때 보잉 747의 세계 최연소 기장으로 이름을 올렸던 비행경력 46년의 베테랑이다. 911 GT3 컵 카의 레이서는 유이 탄 유 히안 씨. 27세의 사업가로, 포르쉐 카레라 컵 레이스에 단 3차례 출전한 루키다. 노련한 기장과 겁 없는 레이서의 한 판 승부. 프로필을 비교해보는 것만으로도 흥미진진하다. 

포르쉐 911 GT3 컵 카가 메마른 배기음을 휘날리며 등장했다. GT3 컵 카는 오직 레이스에서만 뛸 수 있는 경주 전용차. GT3과 달리 수평대향 6기통 3.6ℓ 엔진과 시퀀셜 방식의 6단 변속기를 품었다. 최고출력은 420마력. 그러나 무게가 GT3보다 245㎏ 가벼운 1천150㎏에 불과하다. 따라서 가속이 훨씬 빠르다. ‘제로백’을 3.4초에 끊는다. 

그러나 제트8 로고 선명한 보잉 747이 그 육중한 몸집을 뒤채며 등장하면서, 911 GT3 컵 카는 한낱 점으로 전락했다. 제트엔진의 우렁찬 포효에 GT3 컵 카의 배기음은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보잉 747의 길이×너비×날개 높이는 70.6×59.6×19.3m. 너무 가까이 혹은 멀리서만 봤던 747을, 기체를 시야에 가둘만 한 거리에서 보니 그 위용이 대단했다.  




레이스를 펼칠 트랙의 길이는 약 1.7㎞. 활주로는 더 길지만, 승부는 747이 날아오르는 순간 갈린다. 보잉 747의 최고속도는 시속 900㎞ 이상. 그러나 그건 하늘에서 이야기. 보잉 747은 시속 267㎞ 정도에서 기체를 띄우기 시작한다. GT3 컵 카의 최고속도는 GT3보다 낮은 시속 280㎞ 안팎. 가속 위주의 기어비 때문이다. 막상막하의 승부가 예상된다.  

우리는 피니시 라인 부근에 마련된 그랜드스탠드에 앉았다. 747이 이륙할 즈음이다. 두 선수가 출발선으로 이동했다. 1.7㎞ 너머여서 747은 보이지만, 포르쉐는 가물가물하다. 싱가포르에서도 화제가 되는 이벤트여서인지, 연예인이 무대를 들락거리면서 거의 한 시간을 때웠다. 무더위 때문에 정수리에서 김이 피어오를 때쯤,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드디어 출발 신호가 떨어졌다. 보잉 747이 느릿느릿 발걸음을 떼는 순간, 포르쉐가 총알처럼 튀어나온다. 별 어려움 없이 간격을 유지할 줄 알았다. 그런데 천만의 말씀. 제트엔진의 굉음과 함께 747이 무서운 기세로 가속을 붙이기 시작한다. 747의 가속이 얼마나 빠른지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911 GT3 컵 카와의 간격이 성큼성큼 좁혀지기 시작한다. 

마치 새우를 쫓는 범고래를 보는 듯하다. 포르쉐가 거의 꽁무니를 물릴 즈음, 747은 못내 아쉬워하며 기수를 들어 올렸고, GT3 컵 카는 냉큼 질러 나갔다. 관중석에서 떠나갈 듯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미 8월 1일 리허설까지 마쳤으니 이변이야 일어났겠냐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박빙의 승부였다. 내가 지금껏 경험한, 최고의 새차 발표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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