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세데스-벤츠의 CL-클래스는 길이 5m가 넘는 쿠페다. 쿠페 형 세단이 아니다. 거대한 차체에 정말로, 딸랑 문 두 개만 달았다. 이 황당하게 생긴 CL-클래스는 3세대 째, 2006년 데뷔했고 2010년 부분변경을 했다.
이 렇게 큰 쿠페는 흔치않다. 특히 길이 5m를 넘는 놈은 벤츠 CL-클래스와 롤스로이스 팬텀 쿠페정도가 전부다. 팬텀 세단은 6m를 훌쩍 넘고 팬텀 쿠페도 CL-클래스보다 한참 길다. 상식을 벗어난 크기의 롤스로이스를 제외하면 CL-클래스는 동급 경쟁자가 없다. 비슷한 컨셉을 표방하는 타사 모델이 있지만 그들보다 20~30㎝가 길다. 이 정도면 한 체급 차이다.
CL- 클래스가 이렇게 큰 건 벤츠의 ‘기함’ S-클래스와 DNA를 나눈 이란성 쌍둥이기 때문이다. CL-클래스의 조상은 S-클래스 쿠페로 불리던 ‘SEC’다. 앞으로 나올 CL-클래스는 ‘S-클래스 쿠페’로 이름을 바꿀 예정이다. 따라서 이름만 다를 뿐 과거의 SEC나 지금의 CL-클래스나 사실상 S-클래스 쿠페다.
하지만 CL-클래스 외모에선 S-클래스와 연관성을 전혀 찾을 수 없다. 아무리 이란성이라도 조금 비슷한 분위기를 풍길 만한데 깐깐한 벤츠는 그런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S-클래스는 정통 세단, CL-클래스는 ‘GT’(그랜드 투어러)로 둘의 성격과 할일이 전혀 다른 까닭이다. ‘GT’는 장거리 여행을 위한 고성능 차를 뜻한다. 넉넉한 성능과 풍요로운 실내, 충분한 트렁크 공간을 갖춘 차를 말한다. 여기서 운동성을 위해 무게를 줄이고 승차감을 포기해 까칠함을 더하면 스포츠카로 분류한다.
CL- 클래스의 외모엔 여유가 묻어난다. 뾰족하게 날을 세우지도 않았고 울퉁불퉁한 근육도 없다. 냉정한 세단도, 성깔 있는 스포츠카도 아니기 때문이다. 균형 좋고 매끈하게 빠진 차체에 몇 가닥의 강한 선을 간결하게 그어 완성했다. 온순하고 부드러운 인상 위에 탄력을 불어 넣었다.
보닛 양끝은 둥글게 말았다. 그렇게 만든 두툼한 두 개의 라인만으로 듬직한 앞모습을 연출했다. 커다란 세 꼭지 별 엠블렘을 품은 그릴도 이런 느낌을 부채질 한다. B필러는 과감히 잘랐다. 예리하게 다듬은 반원 안에 옆 창문을 담았다. 앞 펜더에서 시작해 테일램프까지 길게 뻗은 선을 더했다. 그 결과 옆모습엔 긴장감이 넘친다. 고성능 버전인 CL 63 AMG는 입을 크게 벌린 앞 범퍼와 디퓨져를 단 뒤 범퍼, 사각으로 다듬은 네 개의 머플러와 커다란 휠을 달아 좀 더 다부진 자세를 뽐낸다.
몇 걸음 물러서서 보면 그다지 큰 느낌이 들지 않는다. 비례가 좋기 때문이다. 여느 쿠페와 다름없는 느낌이다. 하지만 가까이서 만져보면 기다란 문짝과 뒤 펜더 크기에 흠칫 놀란다. 다른 차에서 보기 힘든 스케일이다.
널 따란 문을 잡아당기면 익숙한 풍경이 펼쳐진다. S-클래스의 포근한 실내를 그대로 옮겨다 놨다. 역시 닮은 구석이 있었다. 특히 앞좌석에선 S-클래스와 구분이 쉽지 않다. 센터페시아와 우드패널, 센터콘솔이 약간 다를 뿐이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뒤를 보면 전혀 다른 풍경이다. 뒤로 뻗어나간 센터콘솔에 좌우로 나뉜 뒤 공간에 독립 좌석 두 개가 놓여 있다. S-클래스는 5인승이지만 CL-클래스는 4인승이기 때문이다.
메 르세데스-벤츠는 CL-클래스에 V8 엔진 두 종류와 V12 엔진 두 종류를 단다. 하지만 국내에는 최고출력 544마력, 최대토크 81.5㎏·m를 내는 V8 5.5L 직분사 터보 엔진과 7단 멀티 클러치 변속기를 맞물려 얹은 CL 63 AMG만 판매한다. 0→시속 100㎞ 가속을 4.5초에 끝내고 최고속도는 250㎞에서 제한하며 1리터로 7.2㎞를 간다.
여유는 스티어링 휠을 잡았을 때도 느낄 수 있다. CL-클래스는 ‘GT’다운 느긋한 주행감각을 가졌다. 가속페달을 때려 밟으면 우렁찬 소리를 내며 쏜살 같이 뛰쳐나가지만 실내선 “밖에 무슨 일이 있니?” 하고 되묻는다. 이런 주행감각은 특히 고속에서 빛을 발한다. 편안하게 고속주행을 유지 할 수 있다. ‘GT’가 장거리 여행용 고성능 차란 사실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브레이크는 페달에 발만 얹으면 휠 사이로 보이는 거대한 캘리퍼가 디스크를 사정없이 깨물어 차를 세운다.
서 스펜션은 앞 4링크, 뒤 독립 멀티 링크 구조에 ABC를 얹은 가변 쇼크 업소버를 단다. ABC는 ‘액티브 보디 컨트롤’의 머리글자. 차의 거동을 바로 잡는 장치다. 주행 중 스티어링 휠을 꺾으면 잽싸게 반대쪽 관절에 탱탱하게 힘을 줘 수평을 유지한다. 때문에 아무리 스티어링 휠을 휙휙 돌려도 오뚝이처럼 바른 자세로 버틴다. 굽이진 길을 요란 법석을 떨며 달려도 역시 무슨 일 있냐는 듯 태연자약하다. 버튼을 눌러 쇼크 업소버의 압력과 지상고도 조절할 수 있다. ABC는 모든 CL-클래스에 기본이다. CL 63 AMG는 한층 더 짱짱하게 조인 ABC를 단다.
CL-클래스엔 S-클래스에서 볼 수 있는 호화로운 안전·편의 장비는 물론, 벤츠가 제공하는 모든 첨단 장비를 기본 또는 옵션으로 달 수 있다.
CL- 클래스는 ‘GT’의 요소를 빠짐없이 갖췄다. 성인 네 명이 타기에 부족함 없다. S-클래스보다 넓은 트렁크를 품었다. 하지만 이 호사스러운 GT는 값에 비해 실용성이 떨어진다. 흔히 말하는 운전재미도 덜하다. 실용성이 아쉬우면 문 네 개와 넓은 뒷좌석을 가진 S-클래스, 재미를 원한다면 풍족함은 덜하지만 손맛 좋고 지붕도 열리는 SL-클래스를 사면된다.
CL-클래스는 대중성과 거리가 먼 차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차를 찾는 사람에겐 이만한 선택도 없다.
글 류민 기자 | 사진 메르세데스-벤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