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니콜라우스 오토(Nikolaus Otto)의 4행정 오토사이클 가솔린 엔진을 시작으로 1886년 고틀리프 다임러와 카를 벤츠의 가솔린 엔진을 통해 상용화되기 시작한 내연기관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대량생산 시스템을 비롯한 여러 기술적인 혁신을 통해 세계적인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여러 자동차 제조사들은 자사의 기술력을 과시하기 위해 속도 경쟁을 벌였다. 그리고 그러한 경쟁에 의해 태어난 차들 중 상당 수는 21세기인 지금에도 명차로 회자된다. 특히 "'속도의 벽'을 허물었다"고 평가 받는 차들은 자동차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기념비적인 자동차로 평가 받는다. 속도의 벽을 허물었던 그 기념비적인 모델들을 만나보자.
1949년, 200km/h의 벽이 허물어지다
오늘날에는 일상용 승용차로도 근접할 수 있는 이 200km/h라는 속도는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1940년대까지만 해도, 양산차에게 있어서 이 속도는 '꿈의 영역'이자, 자동차가 맞닥뜨리게 되는 '속도의 벽'이었으며, 양산차의 성능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으로 여겨졌다. 이 당시는 지금처럼 내연기관의 성능이 좋지도 못했을 뿐더러, 타이어, 섀시 기술 등, 모든 면에서 엄청난 격차가 존재했던 시기다. 그렇다면 자동차 역사에서 이 200km/h의 벽을 허문 최초의 자동차는 어떤 차일까?
그 차는 바로 재규어 XK120이다. 이 차는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3년 만인 1948년에 영국 시장에 출시되었다. 이 당시 재규어는 회사 사정이 대단히 좋지 못했다. 전쟁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은 데다, 미국이 지원한 막대한 원조를 갚기 위해 전국민이 허리띠를 졸라 매야 했던 영국의 사정이 겹쳐, 회사를 운영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어려운 여건 아래서 어렵게 개발한 차가 바로 이 XK120이었다.
재규어 XK120에 붙은 숫자 120은 120mph(약 193km/h)을 의미한다. 이 당시 고성능 스포츠카의 기준은 100mph(약 161km/h)였다. 그리고 120mph의 속도는 경주차나 돼야 겨우 넘볼 수 있는 속도였다. 게다가 그러한 경주용 자동차들은 당대 최고의 엔지니어와 풍부한 자금 지원을 받는 레이싱팀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런데 과거에는 이륜차 옆에 붙이는 사이드카나 만들던 곳에서 느닷없이 경주차에 버금가는 속도를 낼 수 있는 '양산차'를 만들었다는 소식은 당시의 사람들에겐 대단히 허황된 이야기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재규어 XK120이 등장했을 무렵, 영국의 언론은 XK120에 대해 의심과 조롱을 쏟아냈다. 심지어는 “120mph은 커녕, 그 전에 차가 먼저 고장 날 것”이라는 극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언론의 조롱에 격분한 한 사나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재규어의 창업자, 윌리엄 라이온즈(William Lyons)이었다. 경영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유능한 공학자이기도 했던 라이온즈는 단순히 분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과 자신의 차를 모독한 영국의 호사가들과 언론인들을 벨기에의 자베크(Jabbeke)라는 지역에 위치한 왕복 2차선 도로에 모조리 불러 모았다. 그리고서는 자신이 직접 운전대를 잡고 '성능 시연'에 나섰다.
그리고 성능 시연이 끝나고 나서, 그의 차를 조롱했던 이들은 할 말을 잃게 되었다. 이 날 성능 시연을 하면서 기록한 최고속도는 본래의 목표이자, 차명의 유래이기도 한 120mph가 아닌, 무려 132mph(약 213km/h)에 달했던 것이다. 경주차로도 어려웠던 200km/h의 벽을 무명의 자동차 제조사가 만들어 낸 양산차가 깨버린 것이다. 그리고 현장에서 그 성능을 실시간으로 목도한 영국의 언론은 재규어 자동차를 ‘고성능 자동차’로서 알리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재규어 자동차의 이름을 드높였으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재규어의 고성능 DNA가 확립된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