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 플래그십 세단의 역사 - 1970년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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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 플래그십 세단의 역사 - 1970년대 편
  • 모토야
  • 승인 2023.03.07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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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역사의 시작점인 구미권의 자동차 산업은 19세기 말엽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자동차 산업사는 두 세기를 넘나드는 세월 동안 차근차근 성장해 왔고, 산업으로서 뿐만 아니라, 하나의 역사이자 문화로 자리매김했다.

반면 대한민국의 자동차 산업은 이들에 비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성장 속도만큼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고, 지금은 세계 10대 자동차 생산국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현재 국내의 자동차 산업은 조선,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과 함께 대한민국 경제를 책임지는 제조업의 중추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자동차 산업은 한국전쟁 이래 미군들이 버리고 간 지프 등의 차량 부속을 주워모으고 드럼통을 펴서 차체를 만드는 원시적인 단계부터 출발했지만 한 세기도 되지 않는 시간에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여 오늘날에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자동차 강국으로 우뚝 섰다. 

물론 그 중간에는 원천기술을 가진 해외의 자동차 제조사들을 끌어들여, 그들과 기술제휴를 맺고 그들의 차들을 만들어 왔던 시간이 있었다. 전후 빠른 수복을 이루며 눈부신 경제 성장을 하고 있었던 대한민국을 아시아 시장으로의 진출을 원했던 다국적 기업들이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외국계 기업들과의 제휴로 인해, 대한민국 자동차 시장에는 피아트 124와 같은 소형 승용차부터 신진 크라운 등의 중~대형 세단들까지 출시될 수 있었다. 이번 기사에서는 대한민국의 자동차 산업이 발흥하고 있었던 1970년대의 고급세단들을 둘러본다.

새한 레코드 로얄
경영악화로 인해 신진자동차는 새한과 거화로 쪼개지게 된다. 그리고 산은의 관리 하에 들어 간 새한자동차는 이스즈의 제미니를 도입하는 한 편, GM의 출자로 세워진 GMK 시절부터 도입한 레코드(Rekord)는 유지했다. 레코드는 현대의 포드 20M에 비해 크기는 조금 작았지만 유럽풍의 우아하고 세련된 디자인, 그리고 뛰어난 주행성능과 고급 편의 사양으로 무장해 국내 고위층과 중산층의 이목을 끌며, 신진 크라운의 흥행을 성공적으로 계승하고 있었다.

새한자동차는 레코드의 흥행을 굳히기 위해 한 차례 변화를 꾀한다. 이 때부터 등장한 이름이 바로 레코드 로얄(Rekord Royale)이다. 그리고 이 로얄이라는 이름은 훗날 대우자동차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이름이 된다. 이 최초의 레코드 로얄은 약 2년이 조금 넘게 생산되었다. 이후에도 부분 개선 모델인 레코드 프리미어를 출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우그룹이 새한자동차를 인수한 해인 1978년, 새한자동차는 오펠 레코드의 최신 버전인 E형 레코드를 바탕으로 한 신형의 ‘레코드 로얄’을 내놓으면서 대우 로얄시리즈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엔진은 기존 D형 레코드에서 사용했던 102마력짜리 1.9리터 4기통 엔진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리고 이 점이 전화위복으로 작용했다. 2차 석유파동으로 인해 대한민국 장관급 관료들의 관용차를 4기통으로 제한하는 조치가 실행됨에 따라, 장관급 관료들의 관용차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레코드 로얄은 차체에 비해 적당한 가격대는 물론, 상대적으로 우수한 연비를 지닌 데다, ‘장관급 관료들이 타는 차’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지면서 고급 승용차 시장 최고 수준의 판매고를 올렸다. 

기아산업 푸조 604
기아는 현대자동차나 구 신진자동차에 비해 고급 승용차의 도입이 많이 늦었다. 신진자동차와 현대자동차가 60년대에 이미 고급 승용차를 내놓았던 것과는 달리, 기아(당시 기아산업)는 1978년에서야 비로소 고급 승용차를 내놓게 된다. 당시 현대자동차는 포드 20M의 뒤를 이어 포드 그라나다로, 신진자동차의 후신인 새한자동차는 GM과의 연계를 통해 들여 온 오펠 레코드로 고급 승용차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당시 기아는 일본 토요공업(現 마쯔다)과 기술제휴 관계에 있었으나, 이 당시 토요공업을 통해 들여오고 있었던 차종은 주로 중소형 상용차종에 국한되어 있었고, 승용차 모델은 브리사와 당시 인수한 아시아자동차에서 생산한 이탈리아 피아트(FIAT)의 132 정도가 전부였다. 이러한 가운데 기아자동차가 들여 온 차가 바로 푸조 604였다. 푸조 604는 푸조가 제 2차 세계대전 이전에 만들었던 601 이래 처음으로 새로 개발한 대형 고급 승용차로, 일 BMW나 메르세데스-벤츠의 고급 승용차와 경쟁하기 위해 개발된 차량이다. 푸조 604는 피닌파리나가 빚은 늘씬하고 세련된 스타일의 외관에 우수한 성능의 V6 PRV 엔진, 뛰어난 제동성능, 그리고 우수한 주행성능을 자랑했다. 

기아는 1979년 3월, 이 푸조 604를 "뿌조 604"라는 이름으로 전격 출시하며 고급 승용차 시장으로의 진출을 선언했다. 기아는 이 차를 직도입하지 않고, 프랑스 푸조로부터 라이센스를 받고 생산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한 실패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먼저 차량의 가격이 문제였다. 1979년 당시 기준으로 푸조 604의 가격은 2,300만원에 달했다. 이는 당시 국내에서 가장 비싼 가격이었다. 1979년 당시 대치동 은마아파트의 분양가가 대략 2천만원이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집이 굴러다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현대 포드 그라나다
현대자동차가 그동안 플래그십 세단으로 판매했던 포드 20M의 노후화와 더불어, 포니의 수출 초기의 재정부담으로 인해 재정 부담을 안고 있었다. 이 때문에 수요도 충분했고 대당 수익까지 높은 고급 자동차의 생산 및 판매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현대자동차는 배기량 3.0리터 이하, 국산화율 20% 이상 달성이라는 조건 하에 새로운 고급 승용차를 생산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포드 그라나다다.

정통 '구라파' 스타일을 내세운 후륜구동 고급 세단 그라나다는 전/후륜에 모두 코일 스프링과 가스식 쇽업소버를 탑재한 전륜 더블위시본, 후륜 세미 트레일링 암 형식의 4륜 독립식 서스펜션, 현대적인 유압식 랙 앤 피니언 타입 파워스티어링 시스템, 이중 유압식 브레이크, 충돌안전을 위한 보닛 설계와 충격흡수 구조 등, 당대에서 가장 선진적인 기술들이 사용된 자동차였다. 이러한 선진적 설계 덕분에 고급 승용차에 걸맞은 승차감과 주행 성능을 가졌다. 이 외에 전동식 사이드미러와 파워윈도우, 중앙집중식 도어 잠금장치 등, 당시 기준에서는 그야말로 풍부한 편의사양으로 무장했다.

엔진은 102마력의 최고출력을 발휘하는 포드의 V형 6기통 2.0리터 엔진과 싱크로메시(Synchromesh, 동시치합)가 적용된 4단 수동변속기를 사용했다. 이 엔진은 현대가 이전에 생산했던 포드 20M의 엔진과 같은 것이었다. 1980년대 2차 석유파동 이후에는 2.0리터 배기량의 4기통 모델을 추가하고, 새로운 디자인의 라디에이터 그릴과 테일램프 디자인을 손 본 '뉴 그라나다'를 출시하며 인기를 이어갔다. 포드 그라나다는 1986년, 현대차의 새로운 기함 `그랜저`의 등장 이전까지, 약 8년간 4,743대가 생산/판매되었다. 현재 국내에는 약 5대 가량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이며, 70~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등의 영상매체에서 정치인이나 유명인사 등의 자가용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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