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소형차의 흥망성쇠 -1960년대, 자동차 대중화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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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소형차의 흥망성쇠 -1960년대, 자동차 대중화의 시작-
  • 모토야
  • 승인 2022.05.20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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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형차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동차의 보급과 자동차 산업의 육성에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해 왔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은 물론, 자동차의 역사가 시작된 유럽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유럽에서 자동차는 마차와 마찬가지로, 귀족이나 신사 등과 같은 유산계급(有産階級)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전간기에 만들어진 폭스바겐의 카데프-바겐(KDF-Wagen)을 시작으로, 초대 피아트 500, 로버 미니 등의 소형차들 덕분에 유럽 전역에 자동차가 보급될 수 있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도 소형차는 자동차 보급의 첨병으로 활약했다. 소형차는 상대적으로 높은 생산성과 저렴한 가격으로 대한민국의 마이카 시대를 연 중추였다. 하지만 2010년대 후반에 현대자동차의 엑센트, 기아 프라이드, 쉐보레 아베오 등이 줄줄이 단종, 혹은 국내 판매를 완전히 중단되었다. 이로써 국내 시장서 대한민국의 토종 소형 승용차는 완전히 멸종하고 만 것이다. 대한민국 소형차 역사에 이름을 남겼던 차들을 시대 순으로 되짚어 본다.

새나라자동차 새나라(1962)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 주도로 만들어진 새나라자동차는 일본의 닛산과 손잡고 닛산의 소형 승용차 모델인 블루버드(Bluebird)를 반조립(Semi-Knock-Down) 방식으로 라이센스 생산한 모델이다. 이 차의 생산은 일제강점기였던 1937년에 이스즈자동차가 인천 부평에 설립한 국산자동차 공장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새나라자동차는 '새나라 양장미인'이라는 별명과 함께, 당시 국내서 판매되고 있었던 국제차량제작의 '시-발' 자동차를 압도했다. 당시 대한민국 보다 자동차 선진국으로 한참 앞서 나가고 있었던 일본의 승용차를 그대로 들여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품질이나 기술적 완성도 면에서 월등할 수 밖에 없었다. 새나라자동차는 국제차량제작의 몰락에 결정타를 날렸다.

하지만 새나라자동차는 차량의 생산을 시작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새나라자동차는 처음부터 그 설립과 운영에서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다. 후일 드러난 바에 따르면, 새나라자동차는 자체적인 생산은 커녕, 아예 공장이 세워지기도 전에 이미 일본에서 완성된 완성차 2천대를 수입 및 판매했을 뿐만 아니라 규정 이상의 막대한 폭리를 취했다고 한다. 또한 새나라자동차는 각종 특혜 의혹과 함께, 공화당의 정치자금 조달에 이용되었다는 의혹으로 제 3공화국 국회에서 국정감사까지 진행되었으나 그 진상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채 유야무야되었다. 새나라자동차는 증권 파동, 워커힐 호텔 신축, 파칭코 부정 도입 등과 함께 이른 바 제3공화국의 ‘4대 의혹’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신진공업 신성호(1963)
새나라자동차의 등장으로 인해 대한민국 최초의 자동차 제조사 국제차량제작이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던 무렵, 부산에 위치한 '신진공업사'라는 정비개조공장에서 돌연 새로운 자동차를 내놓는다. 이 차의 이름은 '신성호'로, 설립자 김창원氏가 새나라자동차를 보게 된 이래, '순수한 국산 세단'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완성한 국산 승용차였다. 신진공업사는 본래 미군에서 불하 받은 4/3톤 군용트럭을 개조하여 국내 최초로 규격화된 소형버스를 제작하던 회사였다. 그 덕분에 당시 국내서 직접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지프 등 군용차량의 부품들을 조달할 수 있었기에 신성호를 생산하는 것이 가능했다.

신성호는 당시 '양장미인'이라 불렸던 새나라자동차의 디자인과 매우 흡사한 외관과 더불어, 차창과 타이어는 국산품만을 사용하는 등, 국산화율을 높였다. 이 덕에 신진공업사는 윤치영 당시 서울시장의 도움으로 1964년, 신성호를 서울 시청 앞 광장에 전시, 많은 국민에 신성호의 존재를 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신성호는 차량의 생산 방식에 있어서 국제차량제작의 시-발 자동차와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었다. 대부분 일본에서 체계화된 생산 체계 하에 만들어진 완성차였던 새나라와 달리, 신성호는 하나부터 열까지 수공업에 의존하여 만들어진 관계로, 가격조차 새나라자동차에 비해 비쌌다. 하지만 새나라자동차가 4대 의혹 사건으로 인해 몰락하게 되면서 새나라자동차의 부평공장을 인수, '신진자동차'로 거듭나게 된다.

신진 코로나(1966)
몰락한 새나라자동차의 공장을 인수해 본격적인 자동차 제조사로 거듭난 신진자동차는 아시아 시장 진출을 노리고 있었던 일본 토요타자동차(이하 토요타)와 기술제휴를 체결했다. 그리고 신진자동차는 이를 통해 토요타의 양산차들을 라이센스 생산하는 방식으로 국내 시장에 자동차를 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첫 단추를 꿴 차가 바로 코로나(Corona)다. 신진자동차가 생산한 코로나는 3세대 모델에 해당했는데, 이 모델은 일본 시장에서 닛산 블루버드에 비해 내구품질과 신뢰도를 보여, 인기가 높았던 모델이다. 또한 오늘날 토요타의 소형차를 상징하는 이름인 코롤라(Corolla)와 더불어, 지금의 토요타자동차를 있게 해 준 일등공신에 해당하는 차다.

신진자동차에서 생산된 코로나는 1960년대 후반, 국내에서 가장 잘 팔리는 소형 승용차였다. 많은 숫자가 판매된 승용차였던만큼, 택시로도 많은 수가 사용되었다. 신진자동차는 1970년에 4세대 코로나를 '뉴 코로나'라는 이름으로 출시했는데, 이 때 3세대 코로나 또한 수요가 높아 두 모델이 함께 생산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세련된 디자인과 뛰어난 내구성을 가진 신진 코로나는 대한민국의 승용차 보급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진 퍼블리카(1967)
신진자동차는 1966년 코로나를 출시한 지 1년 만에 최고급 세단 크라운과 더불어 더욱 저렴한 가격에 판매할 수 있는 소형 승용차를 함께 출시했다. 이 차의 이름은 '퍼블리카'다. 신진 퍼블리카는 토요타의 소형 승용차 ‘토요타 퍼블리카(Toyota Publica)’를 라이센스 생산한 것으로, 20%정도의 국산화율을 맞추며 생산을 개시했다. 원본에 해당하는 토요타 퍼블리카는 오늘날 일본 경차 산업의 시발점이 되는 1950년대 일본 통산성(現 일본 경제산업성)의 ‘국민차 구상’에 따라 ‘저렴한 가격과 높은 실용성을 양립할 수 있는 자동차를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개발된 차종 중 하나다. 따라서 이 차는 경차로 분류되기도 한다.

신진 퍼블리카는 당시 대한민국의 자동차 보급에 있어 일익을 담당했다. 운전하기 쉬운 작은 차체와 4명을 태울 수 있는 실용성, 그리고 국민차 구상에서 비롯된 간소한 구조와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을 갖췄다. 당시 신진 퍼블리카의 가격은 최고급 세단 크라운의 절반 가격에 불과했다. 신진 퍼블리카의 저렴한 가격은 대한민국의 ‘마이카 시대’를 앞당기는 데 일조했다. 신진 퍼블리카는 퍼블리카의 2세대 모델에 해당하는 섀시코드 P20 계열의 모델이었으며, 1967년 11월 생산 개시 이래 1971년까지 총 2,005대가 생산되었다. 상용차를 포함하여 연 평균 생산량 2만대를 약간 넘었던 이 시기, 퍼블리카의 판매량은 결코 적지 않았던 것이다. 특유의 작은 차체와 그에 걸맞은 귀염성 있는 외형 덕분에 ‘꼬마 차’, ‘왕눈이 차’와 같은 친근한 애칭으로 불렸다.

아시아자동차 피아트 124(1969)
아시아자동차공업(現 기아, 이하 아시아자동차)에서 이탈리아 피아트(FIAT)로부터 라이센스를 받아 생산한 소형 후륜구동 세단이다. 원본인 피아트 124는 1966년 처음 선보인 60~70년대 피아트의 전성시대를 상징하는 걸작 후륜구동 소형차다. 피아트 124는 세련된 디자인과 우수한 성능 및 실용성, 그리고 저렴한 가격으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피아트 124는 피아트의 이후 제품개발에 있어서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4도어 세단 형태를 기본으로, 왜건형 모델인 파밀리아레(Familiare), 2인승 로드스터 모델인 124 스포트 스파이더(124 Sport Spider), 2도어 쿠페형 모델인 124 쿠페 등에 이르는 다양한 파생모델이 존재하며, 아시아자동차가 생산했던 피아트 124는 4도어 세단 형태만 생산되었다.

아시아자동차가 생산한 피아트 124는 원판인 피아트 124와 다름 없는 우수한 성능을 뽐내며 한국의 자동차 시장에서 높은 인기를 끌었다. 당시 소형차의 기준으로서는 유례 없는 코일스프링과 디스크 브레이크를 적용하는 등, 선진적인 설계를 도입한 점이 주목받았으며, 당시 기준으로 고성능의 엔진과 탄탄한 기본 성능 덕에 오너드라이버들이 선호하는 차종이기도 했다. 수냉식 엔진을 사용했음에도 공냉식 엔진 특유의 소음을 냈고, 냉각 성능이 우수하여 장시간의 고속 주행에도 견딜 수 있었다. 훗날 아시아자동차를 인수한 기아자동차가 피아트 124의 후속 모델이라 할 수 있는 피아트 132의 라이센스 생산을 하기 시작한 배경에는 피아트 124가 보여주었던 우수한 품질과 신뢰도가 바탕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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