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가 발명된 이래,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과 '수레바퀴'는 항상 함께 해 왔다. 수레바퀴는 인류의 이동성을 크게 확장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육로 운송 체계를 혁신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어 정치, 경제, 산업, 기술, 그리고 전쟁까지 뒤바꾸었다. 특히 전쟁에서는 도보나 가축을 이용한 운송수단에 비해 막대한 양의 물자를 효율적으로 실어나를 수 있는 수레바퀴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용해 왔다. 수레바퀴가 나타나지 않은 문명은 아즈텍, 마야, 잉카 등, 메소 아메리카에 기반을 둔 문명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그렇다면 자동차는 언제부터 전쟁에 사용되기 시작했을까? 자동차는 19세기 말부터 민간에서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전쟁에 필요한 운송수단으로서 본격적으로 조명을 받게 된 시기는 바로 제 1차 세계대전기라고 할 수 있다. 이전까지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육상 수송 수단은 '우마차', 그리고 '철도'였지만 이 시기를 전후하여 자동차가 가진 수송능력이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철도가 갈 수 없는 곳에도 물자와 병력을 수송할 수 있는 자동차의 능력은 이미 강대국에서는 인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당시까지만 해도 육상운송의 주역은 어디까지나 '철도'와 '우마차'였다. 당시의 자동차는 최신 기술이었기 때문에 지금 만큼의 신뢰도를 가지지 못했고, 유지보수도 다소 어려운 실정이었다. 게다가 생산성 또한 지금처럼 좋은 수준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공장을 쉬지 않고 가동해도 한 달에 1천 대 조차 생산하기 어려웠다. 이리하여 태생적으로 보수적인 태도를 가질 수 밖에 없는 군대에서는 이러한 이유로 자동차의 전면도입을 꺼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 1차 세계대전이 '참호전'으로 요약되는, 인류 역사 상 전례가 없는 소모전으로 치달으면서 자동차의 위상도 변화를 맞기 시작했다. 1km를 전진하기 위해 수십만 명이 희생당하는 가운데, 전선에서 요구하는 병력과 물자의 수요가 폭증했고, 이에 참전국들은 가용한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특히 전 국토가 전쟁터로 변해버린 프랑스는 부족한 수송량을 메우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야만 했다. 제 1차 마른 강 전투에서 파리 시내에서 영업하던 600여대의 택시를 징발해 6천여명의 병력을 실어 나른 일화가 유명하다. 이는 비록 전선에서 요구했던 전체 수송량에 비하면 그야말로 한 줌에 불과했지만, 이렇게 영혼까지 끌어 모은 동원작전을 통해 프랑스는 제 1차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이 시기를 전후하여 프랑스군은 자동차를 본격적으로 전선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개전 당시 6천여대에 불과했던 자동차 수량은 종전에 이르면 10만 여대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시기에 자동차는 물자의 운송 뿐만 아니라 소수의 병력을 실어나르며 기동 전투를 치르는 기계화 보병을 위한 장갑차로도 활용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발명된 롤스로이스 장갑차가 그 대표적 사례다. 극초기형의 전차보다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으면서도 뛰어난 화력을 제공하는 빅커스 기관총을 탑재해 보병을 상대로 우위에서 전투를 치를 수 있었다. 또한 자동차 제조사였던 르노는 이 전쟁에서 현대 전차의 원류로 손꼽히는 르노 FT 전차를 개발,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자동차가 보여 준 수송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은 세계각국은 너나할 것 없이 자국의 군대에 자동차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여년의 시간이 흐른 뒤 제 2차 세계대전에 이르게 되면, 자동차의 수송 분담률이 큰 폭으로 올라갔다. 특히 미국의 경우에는 전시 체제로 돌입하면서 그야말로 막대한 양의 자동차를 쏟아내 전선에 투입했다. 반면, 독일군의 경우에는 미국에 비해 자동차의 생산역량도 절대 부족했고, 아직도 우마차의 수송 분담률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날의 군대, 특히 지상군은 일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인류 역사의 초기부터 제 2차 세계대전까지 전장에서 굴렀던 '말'의 자리를 완전히 대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