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그룹에 합병되기 이전의 기아자동차는 국내 자동차 업계에서도 눈에 띄게 모험적인 제품개발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현대자동차가 철저하게 다수의 니즈를 반영해 '잘 팔리는 차'를 만드는 것을 중시했다면, 기아자동차는 다양한 신기술을 과감하게 적용하여 '잘 달리는 차'를 만드는 것을 중시했다고 여겨진다. '기술의 기아'라는 기치 하에 기술 중심적 사고와 제품 개발 철학을 통해 기아자동차는 대한민국 자동차 역사에 길이 남을 모델들을 여럿 남겼다.
그 중에서도 기아자동차의 첫 중형세단 콩코드는 조금이라도 더 큰 크기와 실내공간, 그리고 부드러운 승차감 구현에 목을 맸던 타사 중형세단과는 참으로 남다른 차였다. 크기는 동급에서 제일 작아 실내공간 또한 협소한 편이었으며, 승차감 또한 탄탄한 축에 들었다. 당시의 대한민국 중형세단 시장의 구미에는 전혀 맞지 않는 차였다. 하지만 콩코드는 경쟁차를 압도하는 스포티한 스타일과 주행성능을 강조하여 대우자동차와 현대자동차가 양분하고 있었던 중형세단 시장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냈다. 이러한 성향은 후속 차종인 크레도스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기아자동차가 현대자동차에 합병되고 나서 등장한 중형세단 '옵티마(Optima)'는 스타일링 일부를 제외하면 근본적으로 현대자동차 EF 쏘나타와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이 때문에 옵티마는 시장에서의 평가가 그리 좋지 못했다. 따라서 다음에 개발될 중형세단은 뭔가 달라도 확실하게 달라야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개발되기 시작한 기아자동차의 새로운 중형세단이 바로 '로체'였다.
"드라이브는 반응이다"... 주행감각 내세운 중형세단
기아 로체는 기아자동차가 2005년에 내놓은 중형세단으로, 옵티마가 출시된 지 딱 5년 만에 등장했다. 이 차는 선대인 옵티마가 가지고 있었던 문제점이었던 'EF 쏘나타와의 차별화 실패'를 보완하기 위해, 근본적인 부분부터 변화를 꾀했다. 기아자동차는 차명인 로체에 대해 "세계 5대 고봉 중 하나인 히말라야 산맥 로체峰(Lhotse : 티벳어)의 이름에서 발음을 따왔다"며, "자신의 한계를 넘어 더 큰 성공과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차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하이밸류 신개념 중형 세단’이라는 기본 개념 하에 개발이 시작된 로체는 총 26개월의 기간과 2,700억원에 달하는 개발비를 투입해 완성되었다. 김익환 당시 기아자동차 사장은 "로체는 수출시장 공략까지 염두에 두고 개발되어, 이전까지의 그 어떤 제품보다 공을 많이 들였다"고 말했다.
로체는 기본적으로 쏘나타(NF)에 비해 약간 더 작은 몸집으로 만들어졌다. 출시 당시 로체의 길이는 4,755mm, 폭은 1,820mm, 높이는 1.480mm였으며, 휠베이스는 2,720mm였다. 이는 2004년 출시된 쏘나타(NF)에 비해 45mm 짧고 10mm 좁으며, 5mm 높은 크기였다. 휠베이스는 10mm 정도 짧았다. 이렇게 한 치수씩 작은 사이즈로 설계한 것은 실상 똑같은 제원으로 등장했던 옵티마의 실패사례를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외관 디자인 자체는 지나치게 수수하다는 평이 많았다. 먼저 출시된 현대 쏘나타(NF)가 세련된 디자인으로 호평 받았던 것과 대조적으로, 로체의 초기 디자인은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측면부의 디자인은 군살 없이 깔끔하게 다듬어진 느낌이었지만, 차의 인상을 결정하는 전면부의 디자인이 다소 엉성한 느낌을 주었다. 후면부의 디자인 또한 그리 좋은 평을 듣지는 못했다. 인테리어 디자인 역시 쏘나타에 비해 다소 투박한 느낌을 주었다. 반면, 실내의 공간은 NF 쏘나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파워트레인에서도 차별화 포인트가 더해졌다. 쏘나타에 1.8 엔진을 적용하지 않는 대신, 로체에는 1.8리터 엔진을 적용하고 V6 엔진을 제외함으로써 파워트레인 라인업에서 차이를 둔 것이다. 기아자동차는 로체의 출시 초기에 1.8, 2.0, 2.4 쎄타(θ) CVVT 엔진으로 라인업을 구성했다. 1.8 쎄타 엔진은 133마력, 2.0 쎄타 엔진은 144마력, 2.4 쎄타 엔진은 166마력의 최고출력을 발휘하며, LPG 모델의 경우에는 밸런스샤프트 적용 여부에 따라 136~140마력의 최고출력을 냈다. 그리고 이듬해 1월에는 쏘나타와 함께 2.0리터 디젤엔진이 추가되면서 기아차 최초의 디젤 중형세단이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2.0리터 디젤엔진은 146마력의 최고출력과 32.0kg.m의 최대토크를 발휘했다.
이로써 로체는 쏘나타 보다 약간 아래에 위치하는 중저가형 중형세단으로서의 포지션을 가지게 되었으며, 가격 또한 쏘나타에 비해 더 낮게 책정되었다. 출시 당시 가격은 수동변속기 기준으로 1.8 LX 모델이 1,473~1,547만원, 2.0 LX가 1,583만원이며, 2.0 LEX는 1,832~2,277만원, 2.4 LEX모델은 2,173~2,619만원이었다. 특히 1.8 모델의 가격은 쏘나타 2.0 모델에 비해 150만원 이상 낮아, 접근성이 높았다.
로체는 개발 당시부터 옵티마의 선례를 따라가지 않기 위해 기본적인 골격부터 변화를 주었다. 그러나 아예 새로운 플랫폼을 신설할 수는 없었기에, 쏘나타(NF)의 플랫폼을 일부 변형하는 형태로 개발이 진행되었다. 캐빈부터 후면까지는 쏘나타(NF)의 것을 따르되, 전면은 준중형 세단인 아반떼(HD)의 것을 접목한 형태로 변화를 주었다. 이 때문에 같은 플랫폼을 공용하고 있는 쏘나타(NF)와 후륜 서스펜션은 멀티링크로 동일하지만, 전륜 서스펜션은 쏘나타는 더블 위시본, 로체는 맥퍼슨 스트럿을 사용하는 구조가 되었다.
또한 로체는 쏘나타에 비해 스티어링 기어비를 조금 더 짧게 세팅했다. 이는 똑같이 스티어링 휠을 감았을 때, 앞바퀴가 쏘나타에 비해 조금 더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티어링 시스템의 정밀도를 약간 희생해서 보다 빠르고 가벼운 조향감각을 얻었다. 기아자동차는 로체의 이러한 특징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아, 故김주혁을 주연으로 한 '아이덴티티'라는 이름의 애드 무비(광고용 단편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렇게 완성된 로체는 2005년 11월, 내수시장 출시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로체는 출시 첫 날부터 논란에 휩싸여야 했다. 로체의 신차출시 당시의 관계자 인터뷰에서 "아반떼(HD)의 플랫폼을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흘러 나왔기 때문이다.
이 인터뷰 한 마디로 인해 로체는 데뷔 때부터 "소형차 플랫폼으로 만든 중형차"라는 오명을 뒤집어 써야 했다. 가뜩이나 차의 크기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대한민국에서 이런 내용의 인터뷰가 나왔다는 것은 이제 막 나온 신차인 로체의 상품가치를 크게 훼손하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기아자동차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쏘나타(NF)의 플랫폼을 바탕으로 개발했다는 해명을 내놓았지만 뒤늦게 말을 바꾼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로체의 이 플랫폼은 2세대 카렌스에도 적용된 바 있다.
이 때문에 로체는 자가용 판매에서는 쏘나타를 추월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먼저 출시된 쏘나타에 비해 투박한 디자인에, 편의장비가 상당히 부실하며, 그나마 편의장비를 어느 정도 적용한 고급형 모델로 넘어가게 되면 쏘나타와 가격 차이가 크게 나지도 않았다. 또한 실제 주행 성능 역시 즉, 로체는 우리나라에서 "소형차 플랫폼으로 만들어진 주제에 가성비도 부족한 차"로 인식되면서 자가용 시장에서는 크게 힘을 쓰지 못했다.
반면, 법인용 차량으로서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쏘나타에 비해 훨씬 낮은 시작가로 인해 차량 가격에 민감한 법인택시 업계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것이다. 이 때문에 로체는 자가용보다 유독 택시로 더 많이 볼 수 있는 중형세단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로 인해 자가용 시장에서는 이미지가 더욱 나빠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로체는 출시한 지 2년만에 '로체 어드밴스'라는 이름으로 부분변경이 이루어진다. 로체 어드밴스는 유럽사양과 동일한 테일램프를 채용해 세련미를 더하는 한 편, 보다 화려해진 그래픽의 크롬 라디에이터 그릴을 적용하는 등, 외관 디자인이 일부 개선되었다.
엔진의 경우에는 성능이 개선된 쎄타 2 엔진이 적용되면서 2.0 모델의 최고출력이 151마력으로 상승했다. 편의사양도 보강되어 상품성이 더 높아졌다. 하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디자인에 대한 평가는 그리 나아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로 다음해의 부분변경에서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게 된다.
2008년, 로체는 '로체 이노베이션'이라는 이름으로 페이스리프트가 이루어졌다. 로체 이노베이션은 초기형 로체에서 가장 혹평받은 부분 중 하나였던 전면부 디자인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친 점이 가장 눈에 띈다.
특히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바로 타이거노즈 그릴이다. 타이거노즈 그릴은 기아자동차가 피터 슈라이어를 영입하고 나서 도입되기 시작한 디자인 요소이자, 오늘날 기아자동차의 시그니처 스타일이기도 하다. 또한 한층 날렵해진 인상의 전면부는 로체의 군살 없는 차체 형상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고, 테일램프 디자인에도 변화를 주어 보다 화려해졌다. 또한, 국산차로서는 처음으로 인테리어에 블랙 하이그로시 마감을 대대적으로 사용하는 등, 여러모로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로체 이노베이션은 전기형과 후기형이 나뉘는데, 전기형의 경우, 크롬베젤 헤드램프와 가로줄 라디에이터 그릴이 적용되는 반면, 후기형의 경우에는 블랙베벨 헤드램프와 격자형 라디에이터 그릴이 적용된다. 또한 후기형의 경우에는 범퍼쪽 몰딩에 크롬이 적용되고 알로이 휠 또한 차이가 있다.
이 외에도 로체 이노베이션에는 다양한 기능들이 추가되었다. 국내 중형세단 최초로 패들시프트가 적용되었으며, 국내 최초로 경제 운전 알리미(ECO) 기능이 내장되었다. 패들시프트의 경우, 2.0 고급 사양 모델에서 선택할 수 있었는데, 2.0리터 모델의 경우에는 자동 4단 변속기를 사용하므오, 사실 상 장식품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는 평이 많았지만 당시로서는 국내 유일의 패들시프트였던만큼, 상당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파워트레인은 기존 라인업에서 판매량이 저조했던 1.8리터 엔진과 2.0 디젤 엔진을 제외시키고, 쎄타 II 2.0 가솔린과 LPG, 그리고 쎄타 II 2.4 가솔린 엔진만 남겨두었다. 가격은 다소 상승했으나, 그래도 쏘나타보다는 낮은 시작가를 유지했다. 이 덕분에 법인택시 업계에서도 꾸준한 수요가 이어졌다. 로체는 2010년, 후속 차종인 K5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단종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