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소련의 폭스바겐 골프? - 라다 사마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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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소련의 폭스바겐 골프? - 라다 사마라 이야기
  • 박병하
  • 승인 2020.04.22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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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공산권의 중심이었던 구 소련의 자동차 산업은 구미권에 비해 상당히 열악했다. 제 2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동안 군수산업에 편중되어 있었던 산업 기반으로는 미국이나 유럽처럼 효율적이고 실용적인 승용 자동차를 빠르게 보급시키기 어려웠다. 또한 광대한 영토를 자랑하는 만큼, 도로사정도 매우 좋지 않아, 육로 운송을 철도에 크게 의존했다는 점도 자동차 산업을 일으키는 데 어려움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소련의 자동차 수요가 결코 적은 것은 아니었다. 소련은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자동차를 만들어 공급하고자 노력했다. 그 이전에는 군용차량을 민수용으로 전환한 형태의 차종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1970년, 이탈리아 피아트(FIAT)와의 기술제휴로 태어난 '라다 쥐굴리(Lada Zhiguli, ВАЗ-2101 Жигули)'를 통해 본격적으로 자동차 산업 육성에 탄력을 받게 된다.

그리고 라다 쥐굴리를 생산하던 '볼가 자동차 공장(Во́лжский Автомоби́льный Заво́д, 이하 VAZ, 現 아브토바즈(AvtoVAZ)의 전신)'은 1980년대, 새로운 소형 승용차를 독자적으로 개발하는 데 성공한다. 1984년도에 처음 등장한 라다 사마라(Lada Samara)가 바로 그것이다. 이 차는 소련 내에서는 생산 시기 및 형식에 따라 VAZ-2108(1984~2003), VAZ-2109(1987~2011), VAZ-21099(1990~2011), 혹은 스푸트니크(Sputnik, Спутник)라는 애칭으로 불렸지만 여기서는 편의 상 모두 '라다 사마라'로 통칭한다.

라다 사마라는 1970년대부터 불고 있었던 '전륜구동'의 바람에 주목하여 개발되었다. 소련과 VAZ는 이미 쥐굴리를 쉴 틈없이 생산하고 있었던 1970년대부터 새로운 형태의 승용차를 개발하고자 했다. 이들의 목표는 서구권에서 한창 주목받고 있었던 폭스바겐 골프와 같은 해치백 타입의 전륜구동 승용차였다. 새로운 자동차의 개발은 수출 시장에서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도 꼭 필요했다. 이에 1970년대 중후반부터 새로운 승용차의 개발에 착수했다.

VAZ는 새로운 승용차를 개발하기 위해, 먼저 라다 쥐굴리로 인연을 맺은 피아트를 찾았다. 피아트는 VAZ의 기술적 토대를 제공한 기업으로, VAZ의 역량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작부터 순조롭지는 않았다. 피아트가 신형 전륜구동 승용차의 개발 협력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는 냉전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던 당시의 상황과 더불어, 피아트가 VAZ을 경쟁상대로 여기고 있었던 까닭으로 보인다.

피아트로부터 퇴짜를 맞은 VAZ는 당장 새로운 기술 협력사를  찾아야만 했다. 이에 VAZ는 서방 곳곳의 자동차 회사와 접촉을 시도했다. 그리하여 1975년, 최종적으로 협력을 결정한 기업은 다름 아닌 자동차 강국 독일의 '포르쉐'였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소련에 입힌 전쟁 피해의 배상을 명분으로 이끌어 낸 결과였다. VAZ와 포르쉐 사이의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승용차는 본격적으로 개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새로운 승용차의 기반 설계는 포르쉐가 담당했다. 1976년도부터 시작해 매년 5억 마르크의 비용을 투입하여 3년의 시간 끝에 설계가 완성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VAZ는 다양한 신기술을 입수할 수 있었다. VAZ는 이 때 획득한 기술을 쥐굴리(VAZ-2103)와 사륜구동 자동차 니바(Niva) 등에 적용하기도 했으며, 린번(Lean Burn, 희박연소방식)엔진 기술까지 획득했다고 전해진다. 린번엔진은 일반적인 엔진에 비해 더 적은 연료를 더 많은 공기로 연소시키는 개념의 엔진으로, 일반적인 엔진에 동력성능이 다소 떨어지지만 약 11~12% 가량의 연비 향상과 안정적인 공회전을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1978년 말, 새로운 승용차 라다 사마라의 첫 프로토타입(시제차량)이 완성이 되었다. 이 프로토타입은 가로배치형 엔진과 전륜구동계, 비접촉식 점화시스템, 그리고 전후륜에 모두 독립식 서스펜션을 채용하는 등, 상당히 선진적인 구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포르쉐 외에도 이탈리아의 UTS 등과 같은 자동차 부품기업들과도 계약을 체결하고 설계를 다듬으며 완성차를 향해 나아갔다.

이렇게 새로운 전륜구동 승용차, 라다 사마라는 1984년에야 비로소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다. 라다 사마라 기존에 VAZ에서 생산하고 있었던 라다 쥐굴리와는 전혀 다른 현대적인 3도어 해치백 스타일의 외관에 전륜구동계, 맥퍼슨 스트럿 전륜 서스펜션과 토션 빔 후륜 서스펜션, 소련 자동차 최초의 랙 앤 피니언 스티어링 시스템, 플라스틱 범퍼와 알루미늄 도어, 크럼플 존(Crumple Zone) 설계개념이 적용된 차체구조 등, 매우 현대적인 구성을 가진 자동차였다.

특히 직선적이면서도 날렵한 전면부와 패스트백형에 가까운 루프라인을 가진 외관 디자인도 특징이었다. 폭스바겐 골프, 포드 에스코트 등, 당대의 유럽 해치백들의 스타일을 벤치마킹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전면부 디자인은 미국 폰티액(Pontiac)의 승용차에서 에서 볼 수 있었던 날렵한 스타일을 참고한 것이었다. 차체 길이는 4,006mm, 폭은 1,620mm, 높이는 1,400mm의 아담한 몸집을 가졌으며, 휠은 13인치 휠을 사용했다. 실내는 4인승 구조로, 뒷좌석을 접어서 짐 공간을 늘릴 수 있는, 현대적인 해치백 승용차의 기본을 따르고 있었다.

엔진은 1.3리터(1,289cc) 배기량을 갖는 실린더 당 2밸브의 직렬 4기통 가솔린 엔진을 사용했다. 이 엔진은 65마력/4,800rpm의 최고출력을 내며, 4단, 혹은 5단 변속기를 통해 앞바퀴로 동력을 전달한다. 최고속도는 150km/h였다. 브레이크의 경우, 전륜에는 디스크, 후륜에 드럼을 사용했다. 1987년 등장한 바리에이션인 VAZ-21081에는 1.1리터 엔진을, 같은 해 등장한 VAZ-21083에는 82마력의 최고출력을 내는 1.5리터 엔진을 탑재했다. 1.5리터 엔진은 전자식 연료분사 시스템을 적용했다. 

라다 사마라는 1984년 12월부터 생산을 개시하여 1985년도에 시장에 풀리게 되었다. 라다 사마라는 당시 소련 내에서 구입할 수 있었던 승용차 중 가장 뛰어난 성능을 내는 자동차였다고 전해진다. 60년대의 설계에 카뷰레터 엔진을 사용했던 라다 쥐굴리만 봤던 소련인들 입장에서는 상당한 고성능 자동차로 다가왔을 것이다. 물론, 수출시장에서는 가격으로 승부하는 저렴한 소련산 승용차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라다 사마라는 1987년도부터 5도어 해치백 모델이 추가되었으며, 1989년도에는 세단형 모델도 추가되었다. 세단형 모델의 이름은 사마라 대신, '사고나(Sagona)'라는, 별도의 차명이 부여되었다. 그리고 이 때 인테리어도 대폭 개량되었고 수출 시장의 규제에 대응하기 위한 인젝션 엔진도 이 때 적용되기 시작했다.

라다 사마라는 소련인들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고성능의 자동차로 인식되었다. 이에 랠리 대회 출전을 위한 특별차량도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경찰의 추격용으로 만들어진 특별차량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경찰용 차량은 기존의 엔진을 버리고 654cc 2로터 방켈엔진을 사용한 VAZ-2108-91로 분류되며, 0-100km/h 가속 시간 8초, 최고속도 200km/h의 성능을 자랑했다.

랠리용 차량의 경우에는 아예 한 술 더 떠서 엔진을 뒤쪽으로 옮겨 실었다. 엔진은 쥐굴리에 사용되었던 1.6리터 엔진을 튠업하여 150마력의 최고출력을 냈고, 차체 외판을 몽땅 파이버글라스로 교체하여 960kg의 가벼운 몸무게를 지니게 되었다. 이 차는 1985년 소유즈 랠리 참여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엔진을 리어미드십으로 배치한 '사마라-에바(Samara-EVA)'도 만들어졌는데, 이 차량에는 더욱 강력한 엔진이 탑재되었다. 또한 라다 사마라는 1991년 파리-다카르 랠리에 출전하여 5위로 경기를 마무리 짓는 등의 활약을 했다.

라다 사마라는 2004년을 전후하여 전면 디자인을 보다 부드러운 인상으로 고친 '사마라 II'를 발표했다. 사마라 II는 실질적으로는 페이스리프트 모델에 가까운 모델이다. 라다 사마라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생산되었다. 최초기형인 3도어 모델 
VAZ-2108은 1984년도부터 2003년도까지 무려 20년 가까이 생산되었고, 5도어 해치백 모델인 VAZ-2109는 1987년도부터 2011년의 24년간, 그리고 세단형인 VAZ-21099는 1990년도부터 ~2011의 21년간 생산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점은 이들 모두 VAZ가 맨 처음 생산했던 라다 쥐굴리보다 일찍 단종되었다는 점이다. 라다 사마라는 지금까지 88만대가 넘게 판매되었으며, 지금도 러시아 내에서는 잔존 개체가 상당히 많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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