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K'와의 이별여행, 지프 랭글러 루비콘 시승기

기사입력 2017.11.27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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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10년 차의 험로 전문가를 마주했다. 은퇴를 앞둔 백전노장이었다. 코드네임 'JK'로 불리는 그는 12월 1일 개막하는 LA 오토쇼에서 데뷔 무대를 가지는 코드네임 'JL'에게 '아이코닉 오프로더' 타이틀을 건네주고 영광스레 퇴역할 예정이다. 이번 시승은 새로운 'JL' 랭글러가 타이틀을 물려받기 직전에 훌쩍 떠나는 'JK'와의 이별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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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K'는 도로에서 눈길을 잡아 끄는 초록색 페인트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여기에 조금 더 안락하게 다져진 '사하라(Sahara)' 모델이 아니라, 온전히 퓨어 오프로더임을 이야기하는 '루비콘(Rubicon)' 언리미티드 모델이었다. 낭만이 가득할 것이라는 처음 생각과는 달리 거친 여행이 될 것이란 생각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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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의 아이코닉 모델이 되기 위한 조건은 유구한 역사를 갖춰야 함과 동시에 헤리티지가 담긴 디자인을 지녀야 했다. 특히 랭글러는 7-슬롯 그릴과 함께 동그란 헤드램프로 만들어내는 얼굴로 브랜드의 시조, '윌리스 MB'의 향취를 여전히 간직했다. 여기에 램프 말고는 곡선을 찾을 수 없는 깍두기 차체도 이 헤리티지의 한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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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불룩하게 튀어나온 큼직한 펜더는 진흙이 잔뜩 튀어도 차체를 크게 더럽히지 않는 기능성을 발휘함과 동시에 퓨어 오프로더 특유의 터프한 감성을 극대화하는 디자인 요소로도 작용했다.

꽁무니에 스페어 타이어를 매단 자태와 선명히 보이는 문짝의 경첩, 그리고 보닛 걸쇠들을 보니 공기 저항이나 멋과 같은 여러 가지 연유로 점차 매끈해져만 가는 오늘날의 SUV들과는 판이한 매력을 느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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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풍채 덕에 도어를 열고 들어가는 꼴이 마치 작전 수행을 위한 군용차에 몸을 싣는 것 같아 분위기는 사뭇 비장했다. 직물 시트에 몸을 맡기고 주위를 돌아보니 인테리어는 여기저기 허름한 구석이 엿보였다. 도어 암레스트를 제외한 실내 요소가 모두 플라스틱으로 빚어졌고, 그 흔한 열선시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AUX와 USB 단자, 알파인 오디오 시스템을 담고 있는 건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일반적으로 도어 트림 쪽에 자리하는 사이드미러 조작 버튼이나 윈도 조작 버튼들은 모두 센터페시아에 위치해 있어 처음 운전 자세를 다잡을 때 애를 먹었다. 랭글러와 여행 경험이 없다면 도통 창문을 어떻게 내리는 것인지 헤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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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옹졸한 사이즈의 모니터로 조작하는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은 UI나 작동 방식이 유려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음성인식 기능이 있긴 해도 도통 무슨 말을 건네야 하는 건지 감이 안 잡혔다. 이와 함께 내비게이션이나 열선 시트는 사하라 모델에만 적용되는 편파적인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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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열로 자리를 옮기려는데 오프로드를 위해 한껏 들어 올린 차체 탓에 승차하는 게 조금은 어렵다. 특히 도어 사이드스텝이 없어 키가 작은 아이들이나 여성들이 타기가 불편할 법했다. 개방이 가능한 루프 덕에 헤드룸은 넉넉한 편이고, 무릎 공간도 크게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시트가 바짝 서 있는 통에 장시간 2열에 몸을 맡기고 있기엔 허리가 고생 꽤 해야 한다.

그러나 지프는 조금 더 고급스럽고 편안한 랭글러의 역할은 '사하라' 모델에게 맡겼고, 이 초록 빛깔 랭글러는 다분히 험로를 즐기는 데에 초점을 맞춘 '루비콘' 모델이었다. 나름대로 역할 분담을 잘 하긴 했어도 '기본 과제'들은 조금 더 충실히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긴 하다. 다만 이제 떠나는 마당에 'JK'를 대놓고 질책할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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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지프는 전혀 주눅 들지 않은 채로 실내 여기저기에 브랜드 이름을 새겨 넣었다. 가령 송풍구 테두리와 크래시패드 하단에 있는 손잡이, 기어노브 등에 'Jeep'를 자랑스레 새겼다.

그리고 지프가 인테리어 곳곳에 발휘한 센스들은 감탄을 자아냈다. 고개를 들어 룸 미러 쪽을 바라보면 지프의 심볼, 그러니까 동그란 헤드램프와 세븐 슬롯 그릴을 형상화한 그림을 새겼다. 그리고 컵홀더 사이를 자세히 보니 또 그 형상을 양각으로 그려 넣어 연신 웃음을 머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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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랭글러는 요즈음의 SUV들이 지닌 색채와는 다른 면모를 지녀 안팎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재밌는 경험이 되었다. 그리고 운전대를 잡고 끝내주는 마지막 이별 여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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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쇠로 단단히 걸어 잠근 보닛 아래에는 3.6리터 V6 펜타스타 엔진이 잠들어있다. 시동을 걸면 방음 대책이 부족해서인지 마치 디젤엔진처럼 울음소리를 제법 우렁차게 내뿜는다. 일단 시작은 평평한 포장도로였다. 매끈하게 닦인 아스팔트 도로에서 랭글러는 의외로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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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타스타 엔진이 내뿜는 최고출력 284마력에 최대토크 35.4kgm의 파워는 2톤을 상회하는 육중한 몸을 무리 없이 이끌었다. 그러나 게으른 오토스틱(AutoStick) 5단 변속기 탓에 신속한 기색은 상당히 옅은 편이다. 고속 구간에서 뻗어나가는 힘도 살짝 부족하여 아쉬움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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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저차가 큰 험로를 주파하기 위해 하체의 대응 폭이 넓어야 했기에 서스펜션 스트로크가 길어 자잘한 요철 정도는 부드럽게 넘겼다. 반대로 좌우에서 관성이 가해지는 순간에는 조금 불안한 면모를 보였다.

바짝 서있는 윈드실드와 각이 살아있는 몸집 탓에 속도를 올릴수록 바람소리와 타이어 소리가 귓가를 울리지만 랭글러의 주 무대는 아스팔트가 아니었다. 아스팔트는 그저 험로와 험로를 이어주는 중간 코스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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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길이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아스팔트에서 무표정으로 일관했던 시간과는 달리 본인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기 시작했다. 평범한 자동차라면 포장이 조금만 무성의하게 되어있어도 시종일관 덜컹거리며 나아갔을 터이다. 그러나 'JK'는 이제서야 본 실력을 드러내며 잔잔한 파도를 만났다는 듯 넘실넘실 거리며 요철을 즈려 밟았다.

특히 랭글러 루비콘은 사하라 모델과는 달리 'Rock-Trac'이라 이름 붙인 정통 기계식 파트타임 사륜구동 시스템을 지녔다. 4x4 전문 브랜드의 기계식 4WD라는 생각에 처음 오프로드를 경험하는데도 자신감이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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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루비콘 라인업에는 험로를 누비기 위해 저속 기어를 겸비한 4WD뿐 아니라 앞뒤 디퍼렌셜에도 모두 잠금장치가 곁들여졌다. 여기에 프런트 스웨이 바도 분리가 가능하여 고저차가 큰 지형에서 수월한 통과를 돕는다. 마지막으로 스키드 플레이트를 하체에 둘러 순수 오프로더 혈통임을 넌지시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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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간한 도심형 SUV라면 4WD 시스템을 갖췄어도 쉽게 주파하지 못할 험로를 아슬아슬하게 넘어가는 랭글러를 보니 알게 모르게 통쾌함이 느껴졌다. 강력한 심장을 품고 아스팔트 도로를 질주하는 스포츠 카들이 자아내는 것과는 또 다른 뉘앙스의 쾌감이었다. 지형에 따라 이리저리 요동치는 스티어링 휠을 굳게 잡고 긴장감이 더해진 순간은 아주 짜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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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K'는 떠나는 순간까지 즐거움을 안겼다. 뒤집어쓴 흙먼지와 흙탕물은 랭글러에겐 훈장과도 다름없었다. 무수한 전장을 헤집어 놓던 윌리스 MB의 유전자를 품은 'JK'는 그 뿌리는 물론, 뼛속까지 아이코닉 오프로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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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JK'는 4,840만 원이란 가격표를 달고 있었다. 미국에서 2만 4천 달러부터 시작하는 대중적인 자동차라는 점을 감안하면 조금은 망설여지게 된다. 국산 대형 세단도 손에 넣을 수 있는 비용이기 때문이다. 다만, 주말마다 험로에 뛰어들 수 있는 여유와 열정을 품은 사람이라면, 'JK'와 손을 맞잡고 여행을 떠날 자격이 있다. 이렇게 랭글러는 오로지 이성으로 판단하기엔 무리가 있는 자동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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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대륙의 국민 오프로더, 그러나 곧 그 타이틀을 넘겨줄 JK를 만나본다고 해서, '슬슬 떠날 때 됐지'라고 생각했다. 물론 실제로 만난 'JK'는 부실한 편의장비나 조악한 일부 조립 상태 탓에 그 생각이 선명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이별을 고하고 뒤로 돌아서려니 'JK'의 동그란 눈망울이 아른거린다. 달콤씁쓸한 이별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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